서울 광화문 드림허브 본사에 설치된 용산개발 건축 모형.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사태는 드림허브의 자금난에서 시작됐다. 드림허브는 지난 3월 12일 1조 1000억여 원 규모의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 원금 상환 연기를 위한 이자 52억 원을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졌다. 이후 코레일은 드림허브의 나머지 29개 출자사와 정상화 방안을 찾았지만 끝내 합의를 모으지 못했다. 코레일이 사업 정상화를 위해 마련한 특별합의서를 민간 출자사들이 ‘독소조항’이 많다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후 청산 작업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코레일은 지난 4월 8일 서울 중구 코레일 서울사옥에서 이사회를 열어 용산 철도정비창 토지매매계약과 사업협약 해지를 결의했다. 즉시 땅값 일부(5470억 원)를 단기차입으로 마련해 채권단에 드림허브를 대신해 돈을 냈다. 계약상 드림허브가 디폴트에 빠질 경우 코레일은 땅값을 대신 갚고 토지를 반환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22일 드림허브와 맺은 토지매매계약이 해지됐고 코레일은 같은 달 29일 드림허브와 29개 출자사에 사업협약 해제를 통보했다. 드림허브가 디폴트 상태에 들어간 이후 49일 만에 토지계약 해지부터 사업협약 해지 통보까지 청산 철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런데 코레일은 청산 절차를 밟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민간 출자사와 사업 정상화를 위한 합의를 진행하는 등 ‘이중 플레이’를 벌여온 사실이 확인됐다. 코레일은 지난 4월 중순부터 열흘 정도 민간 출자사들이 정상화 합의에서 반대했던 일부 조항을 완화해주겠다면서 민간 출자사를 수차례 만났다. 코레일에서 용산개발 사업을 책임지는 송득범 개발사업본부장을 포함한 주요 경영진이 돌아가면서 삼성물산 롯데관광개발 KB자산운용 푸르덴셜 미래에셋 등 민간 출자사들을 만났고 수십 차례의 전화통화로 의견을 나눴다. 코레일은 이렇게 민간 출자사와 만난 끝에 사업 정상화를 위한 특별합의서 수정안을 만들어 4월 24일 민간 출자사로부터 동의를 구했다.
이로써 용산 개발 사업은 다시 정상화로 국면이 전환되는 듯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코레일은 민간 출자사와 수정안을 최종 합의한 다음날 갑자기 민간 출자사와 협상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민간 출자사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접촉한 코레일 측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협상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코레일은 이후 보도자료를 통해 “공기업의 의사결정은 민간기업과는 달리 실무책임자 의견 조율 후 경영전략위원회 검토, CEO(최고경영자) 결정, 이사회 의결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데 시간이 모자란다”고 전했다. 실무책임자 의견 조율 과정에서 진행됐던 특별합의서 변경 추진이 경영전략위원회 검토 등 이후 절차를 거치지 못해 결국 사업협약 해지 추진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용산역 철도정비창 전경. 일요신문 DB
민간 출자사와 특별합의서 수정안까지 만들어 동의까지 구하다가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꾼 이유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정부의 입장이 사업 정상화보다 청산 쪽으로 정리됨에 따라 태도를 바꾼 것이라는 것부터 민간 출자사와 향후 계속될 정상화 협의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까지 다양했다.
코레일 최고경영진이 다시 합의한 특별합의서 수정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게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특별합의서 수정안에는 드림허브 이사회 결의 요건에 민간 출자사들의 의견을 일부 반영해 특별결의(10명 이사 중 7명이 찬성해야 통과) 내용을 추가했고 삼성물산 컨소시엄이 진행하는 토지 정화사업 공사비를 내년 3월 이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삼성물산의 요구사항도 반영됐다.
코레일은 이런 의문에 대해 억측이라고 하고 있다. 코레일 관계자는 “코레일에 일방적으로 자금 부담을 지우는 구조로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겠다는 기본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것뿐”이라며 “민간 출자사 요구대로 할 경우 코레일은 자금 부담이 커지고 정상적으로 사업을 끌고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코레일은 민간 출자사와 협상의 여지가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를 수시로 보내고 있다. 정창영 코레일 사장은 지난 4월 29일 KTX 오송역 기자실에서 “지금은 자금으로 서로 보여줘야 한다. 어쨌건 6월 10일까지는 공식적인 부도가 아니다”고 말했다. 용산개발 사업은 4월 30일 사업 해제 통보로 끝이 났고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다.
민간 출자사들은 사업협약 해지가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며 여전히 협상을 통해 정상화를 모색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민간 출자사 관계자는 “사업협약 해제 정당성에 대해 쌍방 간 사실 확인이 있기까지는 사업협약은 유효하다”며 “이혼 절차가 진행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당장 1조 1000억여 원의 원금 납입 시한인 6월, 드림허브의 공식적인 부도 전까지 코레일과 민간 출자사 간에는 사업협약 해지의 정당성과 책임을 놓고 논란을 벌일 수밖에 없다. 향후 실제 사업이 파산한다면 수조 원 규모의 소송전에 들어가기 위한 전초전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업계는 코레일이 민간과 협상의 여지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향후 불게 될 후폭풍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코레일은 용산사업이 완전히 청산될 경우 당장 7조 3000억 원에 달하는 손실처리 및 대손충당금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완전자본잠식 가능성도 제기된다. 사업 파산으로 큰 재산상 손실을 입은 서부이촌동 주민들의 반발 등 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박일한 헤럴드경제 기자 2013002@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