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들은 초중고교 때 아무리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막상 실전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영화 <영어 완전정복>의 한 장면. | ||
최근 한 시장조사업체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10명 중 6명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답했다. 취업을 해서도 ‘영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영어 프로그램을 듣거나 따로 학원을 다니거나 독학을 하는 등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고 있지만 영어실력 향상은 현실의 요구만큼 빠르지 않다.
외국계 은행 법무팀에 근무하는 J 씨(여·27)는 평일에는 일주일에 3일 학원에 다니고 주말에는 대학 도서관을 찾는다. 취업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지만 영어만큼은 더 큰 고생의 연속이다.
“학교 다닐 때 영어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토익 점수도 높은 편이에요. 하지만 실전에서는 취약점을 갖고 있었죠. 회사가 외국계이긴 하지만 업무가 영어를 많이 쓰지 않는 분야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어요. 영어로 표현된 어려운 법률 용어를 숙지해야 하고 자연스럽게 영어로 메일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막상 공부한 영어를 실전에 써먹으려니 별 소용이 없더라고요. 시험 점수는 단지 점수일 뿐이었어요.”
내심 ‘영어 점수가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L 씨(29)도 요즘 영어 공부에 목을 매고 있다. 의류 수출업체에 다니고 있는 그는 토익 점수도 900점대다.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회사에 취업했을 때의 설렘은 한순간이었다.
“완벽한 실수고 착각이었어요. 제 영어 실력이 얼마나 미천한 것인지 업무를 보면서 여실히 깨달았죠. 현실에서 외국인과 마주치니 귀와 입이 사라진 것 같았어요. 특히 상대방이 눈에 안 보이는 전화 통화는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전화벨만 울리면 가슴이 뛰어서 슬쩍 자리를 비우기도 했죠.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마지못해 받으면 현지 발음으로 속사포처럼 쏘는 영어에 실신지경이었습니다.”
벨소리를 못 들은 척하거나 받아도 저절로 끊어진 척해서 위기를 모면하곤 했지만 회사 가는 게 스트레스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L 씨는 “듣고 말하기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며 “입사 전의 영어는 실전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가 필요해도 현실감 없는 영어실력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영어가 전혀 필요 없는 업무를 하면서도 영어를 해야 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바로 그래픽 디자이너 E 씨(여·32)의 경우. 그는 요즘 영어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승진시험에 영어 공인점수가 필요하다는 회사 방침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제가 하는 업무는 영어가 거의 필요하지 않아요.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영어 잘하면 좋죠. 그런데 영어를 생활화할 만큼의 회화 실력이나 높은 시험 점수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업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직원들에게 승진 조건으로 영어를 포함시킨 건 배려가 좀 없는 처사인 것 같아요. 일이 몰릴 때는 야근이나 밤샘도 많이 하는데 업무량은 그대로에 영어 공부까지 해야 하니 미칠 노릇이죠. 저는 여유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학원도 다니고 하는데 어떤 동료는 아예 포기했어요.”
의류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C 씨(여·31)도 영어가 아킬레스건이다. 국제어로 인정받는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지나친 실력을 요구하는 현실이 불만이다.
“취업 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줄곧 드는 생각이 ‘영어만 잘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거예요. 영어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어도 항상 입사시험에서는 영어 고득점자가 우선권을 갖더군요. 디자이너로서의 창의력보다 영어 점수가 더 중요시된다는 게 정말 안타까웠어요. 포트폴리오를 완벽하게 만들어 가도 영어점수가 없으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죠. 지금도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는 늘 시달리고 있지만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요.”
영어 때문에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단기 어학연수를 다녀온 직장인도 있다. 그렇게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건만 결과가 썩 좋지는 않다. 현재 취업 준비를 하면서 학원 강사로 일하는 K 씨(30)의 얘기다. 그는 중소기업에 다니다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외국으로 나갔다. 1년 정도 공부하고 귀국했지만 현실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휴학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습니다. 그때는 좋았는데 점점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영어 때문이라는 생각에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하지만 1년 만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지는 않았죠. 여유 있게 몇 년 잡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지금 나이도 그렇고 중간에 직장을 다니다 무작정 떠났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시 취업을 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다시 또 고만고만한 회사에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그럼 시간만 날린 셈이니까요. 현실의 벽은 높은데 꿈은 접기 힘들고 불안합니다.”
S 씨(33)도 비슷한 경우다. 빈약한 영어실력이 인생 업그레이드의 ‘걸림돌’이라는 것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한때 외국계 회사 영업팀에 근무했던 그는 지금 보험설계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어릴 때 중국에 잠깐 살아서 중국어는 익숙합니다. 일상 대화가 가능하죠. 그래서 관련 무역회사에서 영업을 했어요. 그런데 영어가 약하니까 한계가 있더군요. 영업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도 많았고 다시 대기업을 목표로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말처럼 쉽지가 않았죠. 나이는 있는데 그만큼의 영어실력은 안 되고, 아무리 중국어가 돼도 일단 영어가 된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S 씨는 다시 일하던 분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의미 없다는 생각에 현재의 일을 시작했다. 주위에서 걱정하는 시선도 많지만 영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즐겁게 일할 수 있어 만족하고 있다.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영어 분야는 ‘말하기’다. 젊은 시절 황금 같은 시간을 투자해 시험 점수를 올려놨더니 회사에 오니 ‘말하기’가 앞길을 막는 셈이다. 외국계 부품회사 10년 경력의 A 씨(40)의 경우 그의 업무 노하우보다 입사 1년차인 신입사원의 능숙한 영어실력이 더욱 인정받고 있다. 결국 A 씨는 퇴사 후 창업을 결심했다.
전문가들은 “시험 점수 위주의 비효율적인 학교 교육이 미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양산한 주범”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아이들이 받는 말하기와 듣기 위주의 교육이 일찍 현실화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