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자동차 노조가 지난 15일 개표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
지난 15일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지부(노조)의 14대 위원장(집행부)을 뽑는 선거에서 백지 투표용지 1장이 나와 재투표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22년 현대차 노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안개 속으로 빠져드는 현대차 노조 선거 막후를 들춰봤다.
지난 16일 새벽 2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노조 선관위 개표장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개표를 하던 조합원들 사이에서 “이렇게 하면 무효”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최초 문제제기는 기호 3번 권오일 후보(43·민주현장) 측 참관인이 했다고 한다. 마산·창원 지역에서 올라온 판매지회 소속의 투표함 하나에서 해당지역 투표 정족수 226명보다 1표가 더 많은 227개의 투표용지가 나왔던 것이다.
이에 노조 선관위원들은 4명의 위원장 후보 측 관계자들을 긴급 소집했다. 당시 전체 개표율은 10% 수준으로 온건파로 분류되는 기호 1번 이경훈 후보(49·전진하는 현장노동자회)가 1위를 달리고, 같은 노선인 기호 2번 홍성봉 후보(48·현장연대)와 강경파인 기호 3번 권오일 후보가 박빙의 2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각 후보 측이 참석한 선관위 긴급회의 결과 일단 나머지 투표함을 모두 개표한 뒤 문제의 투표함 개표 결과가 전체 판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투표함은 무효처리하고 개표 결과를 인정하자고 합의했다. 만약 당락을 가를 정도일 경우 법원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문제의 투표함이 당락을 결정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일단 개표를 속개하기 위해 합의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동이 일단락된 후 다시 개표에 들어가 오전 10시쯤 결과가 잠정 집계됐다. 이경훈 후보가 1만 2700표(득표율 31%)를 얻어 1위를 차지했고 1만 978표(득표율 26.89%)를 얻은 권오일 후보는 2위, 1만 892표(득표율 26.68%)를 얻은 홍성봉 후보가 3위에 올랐다. 강경파인 기호 4번 김홍규 후보(47·민주노동자회)는 가장 낮은 6028표(득표율 14.75%)로 4위를 기록했다.
문제는 2위와 3위의 표 차이가 불과 86표밖에 나지 않아 문제의 투표함 속 226표가 당락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위 이 후보가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해 2위와 함께 결선투표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86표 차이로 3위에 머무른 홍 후보 입장에서는 재투표가 유일한 ‘희망의 끈’인 셈. 게다가 노조 선관위도 홍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선관위는 “합의가 안 되는 상황이어서 직권으로 재투표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각 후보 진영에 통보한 것.
그렇다면 ‘문제의 백지 한 장’은 왜 투표함에 들어갔던 것일까. 선관위의 자체 조사결과, 발단은 경남 창원의 한 지점 투표소였다고 한다. 당일 총 투표자 226명이 모두 투표를 마쳤는데도 투표용지 1장이 남자 투표수 불일치로 인한 투표 무효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자 당시 현장 선관위원이 각 후보 측 참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실무에 익숙하지 않았던 선관위 관계자가 투표가 끝난 다음에 투표용지가 불일치되면 투표함과 같이 따로 보냈어야 함에도 그냥 투표함에 넣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 2위 후보 측에서는 개표결과 승복과 결선투표 진행을 강력히 촉구했다. 4위에 오른 김 후보가 지난 17일 잠정 개표결과에 승복, 사실상 자진사퇴하면서 재투표 반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김 후보 측은 “1차 투표 결과에 대한 무효, 재투표 논의가 진행되면서 조합원 사이에 혼란과 분노가 들끓고 있다”며 “4만 877명의 조합원들이 정상적으로 투표했는데 백지투표 1장으로 왜 무효가 되느냐는 당연한 문제제기”라고 지적했다.
노조 내부에서도 선관위가 재량권을 남용했다며 재투표 반대 여론이 확산됐다. 한 조합원은 “만약 선관위가 재투표를 강행할 경우 누구든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해 선거 자체가 무기한 연기될 수 있다”며 “백지 투표용지 한 장을 빌미로 재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사유가 안 되고 선례도 없다”고 밝혔다.
게다가 재투표가 강행될 경우 아무리 빨라도 10월 초에나 선거를 치를 수 있어 올해 안에 임금·단체협상 타결이 어려워지는 등 조합원들이 입는 피해가 크다는 사실에 선관위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재투표에 대한 법적 근거가 약하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조합원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졌던 것이다.
조합원들의 재투표 반대 분위기에 압박을 받은 선관위는 18일 “문제가 됐던 투표함을 개표해 당락에 영향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 상위 2명에 대해 결선투표를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홍 후보 측에서 재투표를 주장하며 개표를 막아 파행이 계속되는 듯했다. 선관위는 21일 이 문제를 재논의 하기로 했으나 지난 19일 각 후보 측과 만나 문제의 투표함을 개봉하지 않고 잠정집계된 결과에 따르기로 했다고 알려졌다. 단, 3위를 기록한 홍 후보 측이 “상대 후보 측에서 재투표가 홍 후보 때문에 결정됐다고 음해했다”며 “1, 3번 후보가 이를 공개 사과한다면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노조 선거 지연으로 지난 3분기 중에는 끝났어야 할 임금협상이 내년 초까지 이어질 경우 매출 증대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서는 집행부의 성향에 따라 거기에 맞는 대비책을 새로 세워야 하는 부분도 부담으로 다가 온다.
사측은 노조 선거시 조합원이 1차 투표를 할 경우 8시간 근무, 2차 투표는 4시간 근무를 인정해주고 있어 생산 차질도 우려된다.
한편 1차 투표 1위에 오른 이경훈 후보자의 특이한 경력이 새삼 이목을 끌고 있다. 그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5회 연속 위원장 선거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1차 투표에서는 이번 경우처럼 1위로 통과한 경우도 여러 번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번 결선투표까지 갔지만 강경파 후보와 맞붙어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던 것이다. 서너 개로 쪼개졌던 강경파들이 결선투표에서 뭉치는 반면 온건파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번 선거에서도 1위로 통과한 이 후보가 마지막 승자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