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일이든 못하는게 없는 만능 사원이 동료들을 무시하는 말투와 행동으로 많은 적을 만드는 에피소드를 그린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 | ||
마케팅 전문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29)는 둘도 없는 단짝 선배 ‘언니’가 최근 너무 불편해졌다. 얼마 전 대리로 승진한 선배가 많은 면에서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승진 전 선배와 저는 일종의 ‘한 패’였어요. 마치 여고시절 같았죠. 밥도 같이 먹고 퇴근도 같이 하고 티타임도 같이, 뭐든지 함께였어요. 직장 내에서 적절한 호칭은 아니지만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죠. 그런데 두 달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평소처럼 언니라고 불렀다가 면박을 당했어요. 뭐 그건 고쳐야 할 점이라고 쳐요. 그 전엔 서로 메신저로 회사에 대한 불만이나 팀장 흉을 보곤 했는데 이젠 선배가 팀장을 두둔하더군요.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죠. 한번은 팀장이 매번 점심 메뉴를 자기 맘대로 정한다고 선배한테 흘려 말했는데 그 날 점심 때 팀장이 갑자기 저한테 점심 메뉴를 정하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더군요.”
O 씨에게 그동안 답답한 회사에서 유일하게 숨통이 트였던 것이 선배와의 수다였는데 그 길이 막혀버린 셈이다. 회식 때면 구석에 둘이 모여 깔깔대던 시절이 그리울 따름이다. 그는 “이제 식사든 회식이든 어지간하면 팀장 옆에 앉으려는 선배가 섭섭하다”며 “직함 하나 붙었을 뿐인데 너무 달라진 모습이 씁쓸하다”고 하소연했다.
승진 후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거만한 행동이 주변 사람에게는 밉상으로 비친다. 부동산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P 씨(여·31)는 털털하면서 품성 좋다고 생각했던 동료 L 씨가 이제 눈엣가시다.
“제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승진을 하더니 좀 달라지더라고요. 이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붙임성 있게 말도 잘 걸고 얘길 하면 맞장구도 잘 치면서 겸손한 맛이 있더니 지금은 그 모습이 어디 갔나 싶어요. 실적제라서 단기간에 승진을 했거든요. 저보다 한 살이 많은데 2년 만에 부장이 됐죠. 능력은 인정해요. 하지만 ‘완장’을 달았다고 사람이 대번에 변하는 건 좀 그렇죠.”
L 씨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영 못마땅하다는 P 씨는 슬슬 말꼬리가 짧아지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예전에는 편하게 대해도 서로 또박또박 존대를 했던 터라 아랫사람 대하듯 툭툭 던지는 요즘 말투가 거슬린다.
“슬금슬금 말이 짧아지기 시작하더니 ‘○○ 씨 그거 했어? 아, 왜 이렇게 느리나’ 하면서 사람 속을 긁는데 하나가 미워지니까 다 곱지 않아요. 실적이 좋지 않은 동료 앞에서 ‘자기는 이 회사 1년차에도 실적이 이거보다 많았다’면서 은근히 사람을 무시하기도 해요. 이직 초기 겸손했던 모습은 가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한 살이라도 많은 동료가 승진 후에 변하면 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동기라면 상황은 더 달라진다. 식품유통회사에 다니는 H 씨(여·30)는 ‘삼총사’였던 동기 중 한 명과 원래 몰랐던 사람처럼 데면데면하게 지낸다. 동기가 승진 후 확연히 변했다고 느끼기 때문.
“나란히 입사했을 때 부서는 다르지만 세 명이 동네친구 못지않은 우정을 과시하고 다녔죠. 그러다 저랑 다른 친구가 지금 부서로 옮기게 됐어요. 거기까진 좋았어요. 비록 다른 부서지만 본인만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지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있다 그 친구도 지금의 부서로 합류했는데 먼저 대리를 달게 됐어요. 그때부터 우리를 멀리하더군요. 예전처럼 살갑게 굴지도 않으면서 저랑 다른 친구가 가까이 지내면 질투하면서 무시하고 거만한 행동으로 속내를 비치기 시작했죠. ‘얘, 쟤’ 하던 친구 사이였는데 일방적으로 업무지시를 내리질 않나, 늘 감시의 끈을 놓지 않더라고요.”
승진한 동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H 씨. 승진했다고 해서 꼭 지난 모든 추억을 거스르는 ‘위엄’을 갖춰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좋은 친구도 잃고 계속 신경만 쓰는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며 “일부러 보란 듯이 자료 조사 업무를 시킬 때는 얄밉다”고 말했다.
인터넷 기업에서 일하는 K 씨(여·29)는 요즘 스트레스가 많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자 대리 때문이다. 승진하면서 업무 간 혼선을 빚는 행동을 해 졸지에 K 씨가 손님 접대까지 하게 됐다.
“대리로 승진한 직원은 경리로 들어온 사무보조 직원이고 엄연히 따지면 저는 전문적인 업무를 맡고 있어요. 처음에는 회사가 크지 않아서 돕는다는 차원에서 사무실 정리도 같이 하고 그랬죠. 월말 장부 정리로 바쁠 땐 외부 손님 차 접대 정도는 도왔고요. 그런데 대리로 승진하더니 정말 뻔뻔할 정도로 바뀌는 거예요. 연차가 많아서 승진한 건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죠. 한데 이젠 외부 손님이 오면 고개도 안 들고 모른척 해요. 저보고 하라 이거죠. 한 달에 한 번 대청소할 때도 컵 설거지 같은 건 손도 안 대구요.”
K 씨는 가만히 있자니 위에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약한 마음에 한두 번 일어났더니 졸지에 애먼 일까지 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꼭 누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전공’이 다른 마당에 하자니 억울한 마음이 든다. 그는 “승진했다고 해서 아랫사람에게 자기가 하기 싫은 모든 업무를 떠맡기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계속 이렇게 진행되면 참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승진 후 실제로 사람이 변하기도 하지만 동료나 선후배의 승진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민감한 변화다. ‘에이 뭐 다 되는 건데…’ 같은, 나름대로 겸손한 멘트도 승진을 못한 동료들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 최근엔 이직이나 승진에 있어서 다면평가를 반영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그만큼 후배나 동료들의 평가도 중요하다는 얘기. 승진의 기쁨에 들떠 욕먹기보다 다음 인사까지 고려해 행동하는 것이 ‘프로 직장인’이 아닐까.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