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등 고조 지난 1월 8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한 기획재정부 허경욱 제1차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요즘 관가나 금융계에서는 한국은행이 정부의 손아귀 안에 거의 들어갔다는 평가가 회자되고 있다. 과거 한은은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비하될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이 한은의 독립성을 강하게 요구해 한국은행은 정부의 그늘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한은 총재를 대통령이 임명하기는 하지만 기준 금리 결정권을 쥠으로써 한은은 통화정책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한은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전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권위주의적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6년 4월, 13년 만에 내부 승진으로 한은 총재를 임명한 덕이었다. 그때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바로 노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2년 선배인 이성태 한은 총재다. 이 총재는 지난 정권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지시도 거부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한은의 독립성을 지켜왔다.
이런 배경 탓에 정권교체 후 한은은 현 정권에 가장 껄끄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공약으로 당선된 정부인 만큼 저금리 정책(금리가 낮으면 시중에 돈이 돌아 기업 투자 등이 활성화된다, 그러나 물가가 오르는 부작용이 있다)이 필요하지만 한은은 물가관리가 주목적이어서 금리를 낮추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거기다 이 조직의 수장이 전 정권이 임명한 사람이다 보니 현 정권에는 입안의 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은 정권 초기부터 드러났다. 이 대통령의 복심인 강만수 대통령경제특보 겸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이 인수위 시절 “한은은 책임지지 않는 구조” “한은도 정부 조직의 일부”라며 정부 경제정책에 순응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이 총재는 물가 관리 사명을 내세우며 맞섰다. 4년 임기가 보장된 만큼 정권도 2010년 4월까지 이 총재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이러한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지난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로 불거진 금융위기다.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외국의 투자자금이 빠르게 빠져나가자 시중의 자금 흐름을 늘리기 위해 한은의 기준 금리 인하가 불가피했다. 이때부터 주도권은 정부에 넘어갔다.
지난해 3분기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호주와 이스라엘 등 일부 국가는 기준 금리를 올렸다. 여기에 중국과 미국이 지급준비율을 올리는 등 자금줄 죄기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준금리 인상이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재정부와 청와대에서 경제회복이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저금리 정책을 선호하는 데다 이 총재의 임기 만료가 눈앞에 와 있는 호기를 한은 장악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가장 큰 고비는 지난 1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때 찾아왔다. 당시 기준금리가 오를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이 적지 않았다. 실제 HSBC, SC제일은행, 모건스탠리 등 외국계 금융사들이 일제히 선제 금리 인상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자 정부는 11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열석발언권(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권리)을 사용키로 하고 허경욱 재정부 1차관을 금통위에 참석시켰다.
당시 재정부는 한은법에 있는 권리라고 밝혔지만 이러한 열석발언권 사용은 한은의 움직임을 묶어두려는 청와대 의중이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열석발언권 사용으로 정부는 3월이면 임기가 끝나는 이 총재의 발목을 완벽하게 잡았다. 이때부터 ‘이 총재가 힘이 빠졌다’ ‘금리 인상은 물 건너갔다’ ‘한은이 정부를 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금융시장을 지배했다. 사정기관을 완벽하게 장악한 정권의 힘이라는 평가도 이어졌다.
힘을 잃은 이 총재가 물러나기 전 한은이 버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한은 총재에 대한 인사청문회였다. 현재 인사청문회를 거쳐 한은 총재를 임명하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안이 국회 재정위에 올라와 있다. 이 총재도 “한은 위상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정부가 손 안에 들어온 새를 놓칠 리 없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한은 총재 인사청문회를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 사실상 무산된 것.
이번 2월 임시국회에서 한은법 개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차기 총재는 과거처럼 재정부 장관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골인 지점 한 발 앞에 와 있는 셈이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