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9단
올해 GS칼텍스배를 2연패했다. 최철한에게 이겼는데, 이번에도 3 대 0이었다. 그리고 11월에 들어오면서 ‘2014 삼성화재배’와 제19회 LG배, 우리가 주최하는 양대 세계기전에서 결승에 올라갔다. 11월 5~6일 삼성화재배 준결승3번기에서 중국 랭킹 1위이자 한국 기사에게 가장 까다롭다는 스웨 9단에게 2 대 0으로 완승했고, 11월 17~19일에는 LG배 8강전에서 퉈자시 9단, 4강전에서 최철한 9단에게 이겼다. 결승 상대는 삼성화재배는 탕웨이싱 9단, LG배는 박정환 9단.
퉈자시 9단이나 탕웨이싱 9단에게는 상대 전적에서 훨씬 앞서 있다. 박정환 9단에게는 한동안 거의 판 맛을 못 볼 정도로 절대 열세여서 그것도 불가사의였는데, 얼마 전부터 ‘박정환 콤플렉스’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목말랐던 세계 타이틀, 그게 지금 한꺼번에 두 개가 보이고 있다. 삼성화재배는 우승 확률이 6 대 4 정도는 충분한 것 같고, LG배는 5 대 5. 아무튼 지는 것을 잊어버린 요즘 김지석이니 잘하면 동시 점령이라는 팬들의 얘기가 결코 무망한 것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얼굴이 밝고 편안해 보인다. 수읽기와 전투력은 예전부터도 정평이 있었지만, 올해 김지석의 바둑을 보면 엄청난 수읽기와 가공할 전투력에 유연미까지 곁들여지면서 그야말로 경지에 오른 것 같다고들 말한다. 억척스럽게 싸우는 것은 기막혔지만, 어딘지 무리스러운 느낌도 있었는데, 요즘 보면 수읽기와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면서도 예전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리드해 간다는 것이다.
<1도>는 LG배 8강전, 김지석 대 퉈자시의 바둑이다. 김지석이 백을 들었다. 초반은 백이, 좌변에서 2선을 여러 번 긴 모습이 말해주듯, 별로 좋지 않았다. 김지석은 우변에서 드라이브를 걸었다. 끊기고 엷어지는 것을 각오하면서 흑의 우상귀를 도려냈다. 대신 백은 우중앙에 미생마가 생겼고, 근거 없이 흩어져 있는 이 돌들이 수습되느냐, 잡히느냐가 승부가 되었다. 집이 태부족인 퉈자시는 공격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흑1로 가로막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백도 답답해 보인다. 그러나 김지석은 태연하더란다. “답답하긴 무엇이? 이게 잡힐 돌인가…^^?” 하는 표정이었단다. 백2로 붙이며 물어본다. 흑3으로 찝는 것이 강수. 백 모양에 양단수 자리가 생겼다. 그래서 백2는 조금 빨랐고, 자칫 악수가 될지 모른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김지석은 흑도 자충이 되는 것을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4로 또 물어본다. 흑5, 모양은 좀 나쁘지만 잡으러 가자면 도리가 없다. 백6의 붙임과 백8의 한 칸. 이런 식으로 눈이 생기는 것인지. 너무 박약해 보이는데 말이다.
<2도> 흑1 단수치고, 3으로 치중하고, 5로 젖혀 파호하자 백의 모양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러다가 정말 사고가 생기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해설장과 관전석은 긴장하기 시작했는데, 김지석은 여전히 아무런 흔들림이 없더란다.
<3도> 백1로 한 집을 만든다. 흑은 다른 걸 생각할 게 없다. 2, 4로 들이대는 수밖에. 여기서 백5가 등장한 것. 뭐랄까, 마치 무대 뒤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다가 때가 되자 슬며시 커튼을 젖히며 나오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과연 어떨지. 아래쪽에 백△들도 단수로 몰려 있는데…
<4도> 흑1로 이으면? 백2로 따라붙는다. 흑3으로 이쪽을 끊자(뚫자) 백은 대마쪽은 쳐다보지 않고 4쪽을 잇는다. 대형 바꿔치기! 흑은 백 대마를 잡아야만 했고, 잡으면 역전이었다. 그러나 좌상변쪽 흑돌들이 떨어졌으니 대마를 잡아도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흑은 이제는 좌하귀를 A에 보강하든지 하면서 살려야 한다. 그러면 백은 상변 B 등을 선수하고 우하 일대를 정리하게 되는데, 흑이 많이 지는 그림이란다. 퉈자시는 백4까지만 확인하고는 돌을 거두었다.
해설장은 “김지석 9단은 <4도> 백5를 믿고 대마 수습에 걱정이 없었던 것인데, 과연 백5를 어느 시점에서부터 보고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1도>에서 흑이 1로 씌웠을 때부터였을까요? 아마 그랬겠지요?”라는 말로 감탄을 대신했다.
이번 LG배에서는 우리가 모처럼 4강을 독점하고, 우리끼리 결승을 벌이게 되었다. ‘국가대표 상비군’ 효과가 기대 이상이라고들 말한다. 종전의 개인플레이에서 벗어나 지식을 공유하고, 동료 의식이 생기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되면서, ‘내가 이기면 되지 혹은 나만 이기면 되지. 내가 이겨야 한다’에서 ‘내가 아니더라도 저 친구가 해 주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편해져 바둑도 더 잘 된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을 없앤 것도 변수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중국 선수들은 예전에도 코치와 선수들이 함께 점심 식사를 했는데, 그게 좀 공평치 않았다는 것. 조심스럽고 미묘한 얘기이긴 하다…^^.
LG배는 우승 상금 3억 원, 준우승은 1억. 제한시간 각 3시간에 40초 초읽기 5회. 결승은 내년 2월. 삼성화재배 결승이 12월이니 올 연말연시는 김지석 덕분에 즐거울 것 같다. LG배 낭보와 때맞추어 엊그제 ‘국가대표 연구회 리포트-1-신수-신형편’이라는 책이 나왔다. 예전의 ‘충암 보고서’나 ‘신수-신형 시리즈’처럼, 국가대표 상비군 기사들이 공동연구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수준이 높다. <월간바둑> 편집장에서 얼마 전 출판부로 자리를 옮긴 구기호 부장의 첫 작품이다. 신간안내가 나가자마자 계속 전화 주문이 온다고 싱글벙글이다. ‘충암 보고서’를 통해 한국 바둑을 연구했던 중국 기사들이 이제는 ‘국가대표 연구회 리포트’를 탐독할 것이니 정보 유출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거야 뭐.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