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8월30일 청와대에서 신임 정성진 부패방지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법조계에서는 정 위원장의 임명을 단순히 힘있는 대통령 직속 기구에 대한 인사개편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갑작스런 인선에는 다른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법조계 인사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부방위 산하에 신설될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이하 고비처)의 위상에서 찾는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과제 가운데 하나인 부패척결을 담당할 사정의 중심축은 분명 부방위와 고비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정의 무게중심이 검찰과 경찰 등 전통적인 사정기구에서 부방위와 고비처로 옮겨지는 양상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은 시민운동가 출신인 이남주 전 위원장을 앞세운 상태에서는 힘있는 사정을 추진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 전 위원장의 부방위원장 임기가 1년7개월이나 남은 시점에서 전격 경질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노 대통령은 분권형 국정운영 구상을 밝힌 이후 부패청산 업무를 직접 관장하겠다고 언급했다. 이는 부방위 업무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와 다름아닌 것이다. 이 때문에 정 위원장이 검찰을 떠난 지 11년 만에 사정라인에 컴백하는 데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을 것으로 추론된다.
정 위원장은 YS정부 때인 지난 93년 대검 중앙수사부장으로 임명됐으나 그해 3월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 때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사표를 내야만 했다. 그가 신고한 60억원의 형성 과정은 불문하고 ‘마녀사냥’식으로 사표제출을 강요받은 것. 사실 당시 그가 신고한 재산은 그의 부인이 부친(정 위원장의 장인)에게서 상속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정 위원장은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는 검찰 수뇌부에 환멸을 느껴 사표를 제출했다는 후문이다. 사표를 낸 뒤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은 것도 이 같은 검찰과의 악연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여하튼 고비처를 관장하는 정 위원장에게 얼마나 힘이 실릴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고비처가 부방위 산하에 있더라도 별도기관(외청)으로 출발할 것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비처를 대통령 직속기구인 부방위의 하부조직으로 둔다면 정치적 중립 시비가 제기될 수 있고 대통령 등 특정인사에 대한 수사기능 약화될 수 있다는 야당의 반발을 감안한 것이다.
부방위는 이에 따라 고비처에 대해 일반사무에 한해서만 지휘감독권을 행사하고 수사업무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도록 했다. 또 국회 국정감사 또는 국정조사, 고비처장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 및 탄핵대상 추가 등으로 독립성, 중립성 강화를 위한 통제 장치도 마련했다.
그러나 고비처가 이 같은 통제장치와 외청 성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부방위원장의 입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 위원장이 관장할 고비처의 위상은 어떻게 정립될까. 최근 마련된 고비처 설치운영 계획을 보면 고비처의 위상은 실로 엄청나다.
우선 수사 대상이다. 부패방지법에 규정된 고위공직자를 기본으로 하되,일부 권력기관에 대해서는 중간 간부 이상이 포함된다. 이 경우 수사대상은 4천5백∼5천명(가족제외)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차관급 이상 공직자 ▲시·도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공무원 ▲법관 및 검사 ▲장관급 장교 ▲국회의원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 및 경호실 부장 이상 ▲국가정보원 및 감사원의 국장급 이상 ▲국세청 차장 및 지방국세청장 ▲교육감 ▲정부투자기관, 정부산하단체를 포함한 대통령 임명 직위의 40여 개 공직 유관단체의 장 등이다.
이 같은 수사대상 공직자 가운데 검사와 판사가 절반을 넘는 3천 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검사와 판사들은 자신들이 고비처의 1차 타깃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검찰 등은 수사대상의 윤곽이 드러나자 “차라리 대놓고 검사비리조사처를 만들지 뭐하러 우회적으로 검사를 수사대상에 집어넣느냐”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검찰이 이처럼 강하게 반발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 사실 여부를 떠나 법조계 안팎에서는 고비처 신설에 맞춰 부방위 등 관계기관이 법조인, 특히 검사의 비리를 상당부분 축적했다는 소문이 퍼져있기 때문이다.
고비처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고비처 조서에 대한 증거능력 부여다. 고비처에서 수사를 담당할 특별수사관은 고도의 법률적 전문성과 인권 옹호기능이 요구되는 만큼 변호사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한정하고 고비처장이 임명토록 했다. 당연히 특별수사관은 사법경찰권을 부여받게 된다.
이는 특별수사관이 작성한 조서에 대해 검사가 작성한 조서와 같은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검찰에 대한 보고의무가 면제되는 점을 감안, 검사와 대등한 수준의 자격 요건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현행법은 경찰 조서나 국가정보원 조서 등 각종 특별사법경찰관이 작성한 어떠한 조서에도 증거능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다.
고비처 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이후 검찰의 조사과정이나 법원의 공판 과정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어떤 공직자가 고비처 첫 조사 과정에서 증인과의 대질신문이나 각종 정황 증거로 인해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공직자를 기소하기 위해서는 검찰의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공직자는 고비처 조사 이후 검찰로 송치되는 과정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등 자신에 대한 방어권을 행사하면서 정작 검찰에서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도 고비처의 조서에 증거능력을 주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 경우의 공직자가 검사나 판사일 경우에는 차이는 더 커진다. 고비처에서 조사를 받은 검사·판사가 향후 검찰이나 법정에서 자신들의 종전 진술을 뒤집을 경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지로도 해석된다. 이들 판·검사들이 친정 조직으로부터의 받을 수 있는 배려(?)를 막겠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고비처의 주된 수사대상이 판사와 검사라는 점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비처가 아직 입법화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성진 신임 부방위원장의 인선 내용만 갖고 고비처의 활동방향을 거론하는 것이 시기상조일 수는 있다.
하지만 정 위원장이 노 대통령의 직접 지휘를 받아가며 부패청산의 선봉장에 선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검찰을 너무도 잘 아는 특수수사통의 전직 검사간부가 부방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에 검찰 등 법조인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변호사 개업없이 사정라인에 컴백한 정 위원장으로서는 검찰이나 법원에 진 빚이 있을 수 없고, 11년 전에 검찰을 떠나 특별히 챙겨야할 검찰내 후배도 없기 때문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