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의 대종상 남우주연상은 2004년 <올드보이> 이후 10년 만이다. KBS 방송화면 캡처.
이런 흐름을 끊은 이는 한국 영화계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배우 최민식이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명량>은 1700만여 명을 모으며 <아바타>까지 넘어섰고, 역대 국내 개봉 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을 새로 썼다.
최민식의 복귀는 단순히 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충무로의 역학 관계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올드보이> <쉬리> 등을 통해 충무로의 리딩 주자였던 최민식이 주춤한 사이 충무로의 맹주는 송강호, 설경구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명량>을 기점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달 21일 열린 대종상 시상식에서는 충무로 지각 변동을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남우주연상 후보로 <군도>의 강동원, <제보자>의 박해일, <신의 한 수>의 정우성 등 쟁쟁한 배우들이 후보로 이름을 올렸지만 사실상 <변호인>의 송강호와 <명량>의 최민식, 두 사람의 2파전이었다. 두 영화 모두 1000만 고지를 밟았고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각 영화 속에서 두 배우가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대종상은 결국 최민식의 손을 들어줬다. 1999년 <쉬리>, 2004년 <올드보이> 이후 꼬박 10년 만에 최민식이 다시금 대종상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최민식은 “보석 같은 연기를 보여 준 송강호, 항상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박해일, 그리고 사정상 이 자리에 오지 못했지만 정우성과 강동원에게도 박수를 부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최민식이 부활하는 과정은 극적이었다. <올드보이>를 통해 세계적 스타로 거듭난 후 또 다시 박찬욱 감독과 손잡고 <친절한 금자씨>를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후 슬럼프를 겪기 시작했고 상업 영화인 <악마를 보았다>로 컴백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듬해 <범죄와의 전쟁>으로 특유의 폭발적 연기를 관객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 그는 <신세계>를 디딤돌 삼은 후 <명량>으로 최고의 자리를 되찾았다. 게다가 올해는 할리우드 영화 <루시>에도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최민식이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때 그의 곁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낸 송강호는 지난해 폭풍 같은 한 해를 보낸 후 숨고르기를 하며 2014년을 마무리하고 있다. 최민식이 2014년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부활했듯, 2010년 이후 영화 <푸른소금>과 <하울링>이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고 작품성도 인정받지 못하며 침체기에 빠졌던 송강호는 지난해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설국열차>와 <관상>에 이어 <변호인>으로 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모은 관객수는 무려 3000만 명에 육박했다. 게다가 할리우드 배우들을 대거 영입해 영어로 제작한 <설국열차>는 북미 지역에서도 개봉돼 흥행에 성공하며 송강호를 세계적 배우 대열에 올려놓았다.
설경구 주연의 <나의 독재자> 스틸컷과 대종상 핸드프린팅에 참여한 송강호.
송강호는 대종상에 이어 이번 달 중순 열리는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다시금 최민식과 맞붙는다. 설욕의 기회지만 무게추는 최민식으로 다소 기우는 모양새다. <변호인>이 올해 초 상영됐기 때문에 올해 중순 공개돼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리더십에 목마른 대중을 위로한 <명량>에서 이순신을 연기한 최민식의 존재감을 넘기 어렵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하지만 송강호와 최민식을 아는 영화인들은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말한다. 각자의 작품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친 두 배우를 수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한 자리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는 최민식과 송강호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최민식의 공백이 컸던 충무로에서 맏형 역할을 했던 송강호가 최민식을 깍듯이 모시며 다른 영화인들과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두 사람은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 관계로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충무로의 또 다른 얼굴인 설경구 역시 2014년을 뜨겁게 보낸 최민식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최근 개봉된 그의 출연작 <나의 독재자>는 당초 최민식이 출연을 검토하던 작품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설경구의 품에 안겼다. 극중 김일성의 대역 배우 역을 맡은 설경구는 <박하사탕> 이후 역대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는 평을 받았지만 흥행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설경구는 지난해 <감시자들>을 시작으로 <스파이> <소원>에서 스릴러, 코믹, 감동적인 드라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스펙트럼 넓은 연기를 펼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의 열연에 힘입어 <소원>은 지난해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때문에 올해의 흥행 성적이 다소 아쉬울 법하지만 최민식과 같은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설경구는 선배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었다는 후문이다.
세 배우는 2015년 또 다른 경쟁을 준비 중이다. 설경구는 이승기와 함께 영화 <서부 전선>을 촬영 중이고, 송강호는 설경구와 <소원>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준익 감독의 신작인 <사도>에서 생애 처음으로 왕을 연기한다. 또한 설경구에게 이승기가 있다면 송강호는 후배 배우 유아인의 지원사격을 받는다.
최민식은 <신세계>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과 다시 손을 잡는다. 이달 중순 크랭크인하는 영화 <대호>에서 신령한 호랑이를 수호하는 늙은 포수 천만덕을 연기한다.
또 다른 영화계 관계자는 “최민식은 연배가 높고 송강호와 설경구는 또래다. 때문에 평소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두 배우 모두 최민식을 극진히 모신다”며 “세 사람은 단순 비교 대상이 아니라 충무로를 함께 짊어지고 나가는 동급의 국가대표 배우”라고 평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