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글러브가 완성되려면, 세심한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기계화가 많이 진행됐는데도 여전히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 많다. 프로 선수용 글러브는 무조건 맞춤 제작이다. 야구가 직업인 사람들이니 당연하다. 손 모양과 크기를 정확하게 맞추는 게 관건. 글러브가 너무 크면 안에서 손이 미끄러지고, 너무 작으면 손이 꽉 껴서 불편하다. 대체적으로 손이 작은 선수들이 글러브 크기에 민감하다. 그래서 글러브 공장 한 쪽에는 선수들이 보내온 손 모양 사진이 수북이 쌓여 있다.
수비 하나에 웃고 우는 프로야구 선수들은 실책을 줄이기 위해 맞춤 제작한 글러브를 사용한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프로용 글러브는 가죽부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주 재료는 ‘킵(Kip)’이라고 불리는 송아지 가죽. 주로 미국에서 생산되고 일본에서 가공한다. 쭈글쭈글한 뱃가죽보다는 팽팽한 등가죽을 사용하는 게 1등급이다. 보송보송하고 가벼우면서도 질기다. 15평 정도의 킵 한 장으로 만들 수 있는 글러브는 단 3개뿐. 그만큼 글러브 가격도 고가로 매겨진다. 이보다 한 단계 아래 등급은 ‘스티어 하이드(Steer Hide)’라고 부르는, 생후 2년 정도 된 수소의 가죽을 쓴다. 스티어 하이드는 킵보다 거칠고 무거운 대신 내구성은 더 좋다.
#포지션마다 글러브도 다 다르다
글러브는 포지션별로 모양과 크기, 무게가 모두 다르다. 포수와 1루수의 글러브는 ‘미트’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구조가 벙어리장갑(Mitten)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 투수의 투구나 야수의 송구를 직접 받아내는 ‘포구’ 역할이 가장 중요한 글러브들이라 가장 무겁고 단단하게 제작된다. 크기는 포지션별로 다 다르지만, 보통 내야수 글러브(1루수 미트 제외)가 외야수 글러브보다 작다. 보통 2루수는 11.25인치, 유격수는 11.5인치, 3루수는 11.75인치, 1루수와 외야수는 12.75인치의 글러브를 쓴다. 투수 글러브는 12인치로 내야수와 외야수의 중간 정도. 포수 미트는 길이가 3루수 글러브와 비슷하지만, 무게는 약 760g으로 가장 많이 나간다.
포수의 미트는 투수의 공을 계속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단단하게 제작되고, 투수의 글러브는 그립 동작이 노출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조금 크게 제작된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물론 이 수치들은 평균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같은 포지션이라도 자신의 손 크기와 체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제작된 글러브를 쓰기 때문이다. 또 투수 글러브는 원래 자신의 손 사이즈보다 조금 여유 있는 크기를 쓰는 일이 많다. A 투수는 “타자나 주자, 주루코치 등이 모두 투수의 동작과 버릇을 유심히 살피기 때문에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잡을 때 동작이 노출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투수의 글러브는 공을 숨기는 데에 가장 큰 목적이 있어서 조금 크게 제작된다”고 설명했다. 대신 투수들은 상대적으로 글러브에 덜 예민하다. A 투수는 “투수는 글러브의 반대 손으로 공을 던지고 투수 강습타구도 흔하지 않다. 다른 선수의 글러브를 빌려 써도 경기에 가장 지장이 없는 포지션이 바로 투수”라고 설명했다.
#글러브 제작 과정
글러브는 여러 개의 가죽조각을 끈으로 엮어서 만든다. 제작 과정도 그만큼 세밀하다. 공정은 가죽을 재단하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먼저 특수한 칼로 외피로 쓸 16조각을 절단한다. 내피는 손목부분의 양털까지 8조각 정도가 필요한데, 손바닥과 가죽이 닿는 부분은 촉감이 부드러운 사슴 가죽을 쓴다. 또 손가락 부분을 뻣뻣하게 고정시키는 합성수지 재질의 펠트 7조각도 필요하다. 이 가죽조각들에 끈을 끼울 수 있는 200여 개의 구멍을 내야 한다.
이용규가 사용한 글러브.
가죽의 두께도 무척 중요하다. 공이 박히는 부분(외피 수구면)은 2.2㎜에서 2.4㎜로 맞춰야 한다. 손등 부분은 1.8㎜. 공과 마찰이 가장 많은 엄지와 검지 부분은 2.0㎜를 유지한다. 이보다 두꺼우면 글러브가 너무 무거워지고, 얇으면 가죽이 금세 찢어진다. 이 두께를 맞추기 위해 쓰는 나이프의 가격만 해도 수천만 원에 달한다.
가죽이 다 준비되면 외피와 내피를 따로 봉제한다. 울퉁불퉁해진 이음새 부분은 망치로 두드린 후 다리미 기계에 꽂아 반듯하게 펴준다. 그 다음에는 외피 안에 내피와 펠트를 집어넣고 가죽 끈으로 손가락 사이를 연결한다. 이 단계에 와야 글러브다운 형체가 드러난다. 마무리 작업도 필요하다. 망치로 글러브 안쪽을 때려서 오목하게 ‘볼집’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열풍기로 뜨거운 바람을 쐬어 모양을 고정시킨다. 글러브 하나가 비로소 완성된다.
#잘 길들인 글러브 하나,한 시즌 간다
갓 완성된 글러브는 딱딱하다. 선수들이 경기 때 불편함 없이 쓰려면 가죽을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자신에게 맞는 모양을 잡아야 한다. 야구인들은 이 과정을 ‘길들인다’고 표현한다. 내야수인 B 선수는 “예전에는 글러브 가죽이 터무니없이 딱딱해서 새 글러브를 실전에 사용하려면 최소 일주일 정도는 손에 맞게 고정시켜야 했다”며 “글러브 안에 야구공을 넣어두고 끈으로 동여맨 뒤 깔고 앉거나 아예 잘 때 베고 자는 일도 많았다”고 귀띔했다. 스팀기나 뜨거운 물에 글러브를 넣어 가죽을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방법도 유행했다. 외야수인 C 선수는 “글러브 전용 크림을 구비하고, 비상시에는 바셀린을 수시로 발라 부드럽게 길을 들였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글러브 제작업체들은 인위적인 ‘길들임’을 권유하지 않는다. 가죽이 망가져서 오래 못 쓰기 때문이다. 캐치볼을 많이 해서 자연스럽게 모양을 잡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무엇보다 요즘은 글러브 자체의 완성도가 예전보다 훨씬 높다. C 선수는 “야수들은 2~3일 후, 투수들은 받은 당일에 바로 경기에 끼고 나가도 될 정도로 부드럽고 질 좋은 글러브가 많이 들어온다”고 증언했다.
1루수 글러브는 다른 내야수와 달리 벙어리장갑 형태의 미트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배트와 달리 글러브는 구단들이 금전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대신 글러브 제작 회사들이 많아진 덕분에 웬만한 프로 선수들은 협찬을 많이 받는다. 앞서의 B 선수는 “신인이나 무명 선수들은 수십만 원대의 최고급 글러브를 사기 위해 다소 부담되는 지출을 해야 한다”며 “협찬을 여러 개 받는 선수들이 동료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흔하다”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글러브는 보관만 잘 하면 오래 쓸 수 있다. D 선수는 “글러브의 공급이 많긴 하지만, 한 번 길이 제대로 들거나 글러브에 얽힌 징크스가 생기면 교체하지 않고 오래 쓰는 선수들이 많다”며 “특히 글러브가 수비에 가장 중요한 내야수들은 완전하게 손에 맞춰진 글러브로 한 시즌을 날 때도 있다. 해지면 고쳐서 다시 쓰기도 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러브가 있지만, 자신의 손에 날개를 달아주는 글러브를 만나기는 그만큼 어렵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글러브에 얽힌 갖가지 사연 모든 글러브 챙기는 백업도… 선수들에게 글러브는 그냥 단순한 야구장비가 아니다. 때로는 그들의 애틋한 마음과 사연이 담긴다. LG 봉중근은 2012년 말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잠실 롯데전에서 시구자로 나섰다. 아들은 직접 아버지가 던진 공을 받았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봉중근은 자신의 글러브 제작사에 “아버지 사진을 글러브에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야구선수 아들을 늘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와 마운드에서 항상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였다. 봉중근의 등번호가 새겨질 자리에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그 후 봉중근은 글러브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눈을 맞추며 마운드에 올랐다. 넥센 손승락은 3년 전부터 주홍색 글러브를 낀다. 일부러 붉은 계열로 제작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유가 있다. 언젠가부터 붉은색은 그에게 행운의 징표가 됐다. 그는 “아내가 연애 시절에 빨간색 수첩 한 권을 선물로 줬다. 투수들은 메모할 일이 많은데, ‘이 수첩에 메모하면서 야구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수첩을 쓴 이후로 정말 야구가 잘 됐다”고 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글러브도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모두가 아는 대로, 손승락은 붉은색 글러브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글러브는 때로 백업 선수들에게 새로운 ‘생존’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롯데 박준서는 포수만 빼고 모든 포지션의 수비가 가능하다. 캠프 때면 날마다 내야와 외야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훈련한다. 그래서 시즌 때는 외야수 글러브, 내야수 글러브, 1루수 미트를 모두 지참하곤 한다. 이건열 동국대 감독도 그랬다. 투수 빼고 모든 포지션을 다 해봤다. 스타군단 해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포수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미트를 손에 꼈다. 넥센 홍원기 코치 역시 현역 시절 1루수·2루수·3루수·유격수로 두루 활약하면서 ‘내야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한 경기에서 1·2·3루수를 다 해본 경험도 있다. 그가 늘 준비해야 했던 글러브 역시 세 개. 그래도 뿌듯한 마음이 앞선다. 이들은 “멀티 내야수라는 꼬리표가 내게는 자부심이다. 모든 글러브에 다 애착이 간다”고 입을 모았다. [은] |
‘글러브 던지기’ 에피소드 손시헌, 고영민 ‘글러브 토스’로 더블플레이 글러브는 공을 안전하게 받기 위해 만들어진 장비다. 그러나 가끔은 공이 아닌 글러브를 ‘던져서’ 화제가 되는 선수들도 있다. 2010년 두산 2루수 고영민이 자신이 잡은 땅볼 타구가 글러브에서 빠지지 않자 글러브를 통째로 토스해 더블플레이를 성공시켰다. 최고의 투수였던 해태 선동열은 자신 앞으로 날아온 강습 땅볼을 잡고 1루로 송구 하려다 공이 글러브에서 빠지지 않자 1루 쪽으로 달려가며 글러브를 통째로 1루수에게 토스해 타자주자를 아웃시킨 적이 있다. 최근에는 넥센 한현희도 비슷한 장면으로 화제가 됐다. 여유 있게 땅볼 타구를 잡았다가 글러브 사이에 낀 공을 빼지 못하는 바람에 글러브를 통째로 1루로 던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현희의 글러브는 타자주자보다 늦게 1루에 도착했다. 이 출루는 엄연히 ‘투수 송구 실책’으로 기록됐다. 사실 ‘글러브 토스’에 관련된 내용은 야구 규칙에 명확하게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공이 일단 글러브에 박힌 순간, 공을 품고 있는 글러브는 공과 동일하게 간주된다는 유권 해석이 내려졌을 뿐이다. 투수뿐만 아니라 내야수들도 종종 비슷한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2010년 당시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군림했던 두산 유격수 손시헌과 2루수 고영민이 좋은 예. 무사 1루 상황에서 땅볼 타구를 잡은 고영민은 병살 플레이를 위해 2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시헌에게 송구를 하려 했다. 그러나 공이 글러브에서 빠지지 않자 아예 글러브를 그대로 토스했다. 글러브가 손시헌에게 날아가는 동안 공이 밖으로 빠져 나오기 시작했고, 손시헌은 그 공을 허공에서 맨손으로 낚아챈 뒤 1루로 던져 무사히 더블플레이를 완성했다.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최고의 수비 가운데 하나다. 반대로 공이 들어 있지 않은 글러브를 잘못 쓰면 낭패를 본다. 2005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5차전. 3-3으로 맞선 8회 2사 1루서 LA 에인절스 투수 켈빔 에스코바르가 시카고 화이트삭스 A.J. 피어진스키의 땅볼 타구를 잡았다. 그러나 에스코바르는 공을 쥔 오른손이 아니라 공이 들어있지 않은 빈 글러브로 타자주자를 태그해 세이프가 선언됐다. 끝나야 할 이닝이 2사 1·2루로 이어졌고, 화이트삭스는 결승타를 쳤다. 에인절스는 월드시리즈 진출에 패했다. 물론 ‘글러브 던지기’를 가장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상황은 선수가 경기 도중 감독의 교체나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표출할 때다. 대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 야구팬들이 단체로 열광했던 장면도 있다. 2008베이징올림픽 쿠바와의 결승전 9회말. 포수 강민호(롯데)는 심판의 의아한 볼 판정에 ‘낮은 공이었냐’는 질문을 했다가 갑작스럽게 퇴장 명령을 받았다. 어안이 벙벙해졌던 강민호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미트를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울분을 담아 빠르고 강하게 날아가는 미트를 보면서 온 국민의 속이 풀렸다. 한국은 결국 극적인 병살타를 솎아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