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9월9일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 천정배 원내대표 등과 만찬회동을 가졌다. 최근 열린우리당 내엔 정권재창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 ||
47석의 ‘미니 여당’에서 ‘탄핵풍’이란 전대미문의 호재에 힘입어 총선에서 원내 과반을 넘는 1백52석을 확보하고, 한 달 후(5월14일)엔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앞길에 거칠 것이 없으리란 예상과는 백팔십도 다른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1백 년 가는 정당을 하자”(노 대통령, 5월29일 열린우리당 당선자와의 청와대 만찬)며 자신감에 들떠 있던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3기 정권 재창출’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위기감은 추석 연휴기간을 지나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30%대 초·중반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 20%대까지 떨어진 채 한나라당과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정당지지율에 대한 불안감이 당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표상의 ‘적신호’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극도로 악화된 ‘체감 민심’이었다. 막연히 ‘좋지 않다’ 정도로 생각했던 민심이 실제 겪어본 결과 예상외로 심각하다는 사실이 확신되면서 불안감은 위기감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여당이 옛날보다 국민들을 먹고살기 힘들게만 한다는 질책만 실컷 들었다”(조경태 의원), “여당 의원으로서 정말 고개를 못들고 다니겠더라”(박기춘 의원)는 하소연이 줄을 이었고 이부영 의장도 “국민의 따가운 질책”이란 표현으로 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했다.
친노 그룹의 한 의원은 “계층과 지역을 불문하고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비난하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조차 없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열린우리당의 고민은 작금의 상황이 계속될 경우 2007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이 무망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음에도 원인 진단과 처방에 있어 계파간, 의원-당원들간 시각차가 너무 커 해법 마련이 난망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주요 정국 현안에 있어 자생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노 대통령의 의중을 좇아만 왔던 한계가 계속 노정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9월15일) 이후 국내 정치에 대해 입을 닫고 있으면서 열린우리당의 상황은 그야말로 ‘선장 없는 배’의 신세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만성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급기야 정권 재창출에 대한 자신감마저 옅어지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속사정을 들춰봤다.
수도권 재선인 A의원. 당내에서 개혁성과 합리적인 면모, 친화력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최근 여권이 겪고 있는 난조의 원인을 “전략 없이 ‘개혁 강박증’에 휘둘린 아마추어리즘의 폐해”라고 진단한 후 “지금의 상황이 극복되지 않은 채 내년 1~2월 전당대회까지 이어진다면 국회의원 재보선과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패배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며 2007년 대통령 선거도 극히 위험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A의원은 위기의 원인으로 무엇보다 “여당이 여당답지 못한 점”을 꼽았다. 그는 “총선에서 원내 과반을 이룬 후 열린우리당엔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내에선 겉으론 ‘1백 년 정당’을 운운하지만 지도부부터 일반 당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안을 계파간 이해관계, 권력투쟁의 관점에서만 접근했고, 그러다 보니 기간당원 요건을 놓고 볼썽사나운 논란이 벌어지는가 하면 당 의장직부터 하위 당직 인선에 이르기까지 계파간 충돌이 일상화됐다. 대야 관계에서도 원내 과반을 가진 ‘맏형’의 면모를 보여주기보다는 전략적 고려 없이 개혁 선명성만 내세운 나머지 ‘문제를 푸는 여당’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야당’ 수준으로 스스로를 격하시켰다”고 비판했다.
실용주의 성향이 강한 의원들의 상황인식과 전망은 더욱 비관적이다. 특히 관료·전문가 출신으로 친노 그룹의 범주에 들지 않는 이들은 노 대통령의 국정운용 스타일과 당 지도부의 당 운영에 대해 불만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형편이다. 고위 관료 출신 한 초선 의원은 “유신시절부터 여러 정권을 겪어 봤지만 집권 1~2년차에 현 정권처럼 인기가 없는 경우는 처음이다. 대통령부터 열린우리당 의원, 당원에 이르기까지 뭔가 하려는 의욕은 꽉 차 있는 것 같은데 말만 무성할 뿐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 여권의 현 주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여권 핵심부부터 해법을 못찾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권에서 장관을 지냈던 한 원외 인사는 국정지지도의 ‘상방(上方) 경직성’이란 개념으로 2007년 대선에 대한 불안감을 표명했다. 이 인사는 “통상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임기 1~2년 차엔 60~70% 정도의 지지도를 나타내다 3년차를 고비로 50%대로 떨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은 그와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임기 첫해야 원내 과반을 차지하는 거대 야당의 횡포에 발목이 잡혀 지지도가 하락했다는 변명이 통할 수 있었지만 총선 승리와 노 대통령 직무복귀 후 국정지지도와 정당 지지율이 나란히 20%대 후반~30% 초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여권의 총체적 난조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문제는 경제학에서 ‘가격의 하방 경직성’이란 개념이 있듯 정권의 지지도엔 ‘상방 경직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번 떨어진 지지율, 그것도 한창 정권이 힘이 실린 초기에 지지율이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남은 기간 올라봐야 다른 정권의 말기 지지도 이상 오르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에 정권을 계속 잡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당 지도부도 앞날을 걱정스러워 하긴 마찬가지다. 한 핵심 당직자는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여당의 인기가 위험수위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와 민생을 챙기겠다고 나선다고 국민들에게 이를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인식시킬지를 고민해 보면 마땅한 묘안이 없다. 그렇다고 이미 잔뜩 벌여놓은 개혁과제들을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유야무야시킬 수도 없지 않느냐. 그랬다간 당장 ‘개혁의지가 없어졌다’며 핵심 지지층인 개혁세력이 등을 돌릴 것이 뻔하다. 문제는 청와대와의 관계도 소원한 데다 한계가 분명한 과도 지도부가 이끌고 있는 지금의 당으로선 개혁세력과 안정-보수 세력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신세를 극복할 방안도 역량도 없다는 점이다”고 토로했다.
당내 개혁진영도 지금의 국면이 위기라는 점과 지도부의 무기력을 비판하면서 해결방안을 내놓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한 386 의원은 “경제가 어려운 것도, 정권의 인기가 바닥이라고 해서 개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제고시키기 위해 규제개혁을 한다고 해도 출자총액제한제 등 핵심 재벌정책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경제와 민생을 내세워 개혁입법을 유보하자는 등의 주장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한심한 것은 당 지도부가 국가보안법 폐지나 과거사 규명 등 개혁과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국민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반대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주저주저하고 있는 점이다. 리더십의 본질은 일관성인데 여론에 따라 당의 대응이 오락가락하니 국민들에게 여당이 책임 있는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고, 그것이 지금 겪는 위기의 본질적인 원인이다”고 분석했다.
개혁당 그룹의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자랑하는 ‘열성 당원’들의 당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에 대한 비판과 상황 처방은 당내 이념-노선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narasarang’이란 ID로 글을 올린 한 당원은 “지금까지 자신이 ‘노빠’라 하면서, 선거 치르면서 대통령의 이름을 팔고, 대통령의 사진을 팔아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들이 대통령이 맞을 매를 대신 맞아준 사람이 과연 열린우리당에 얼마나 있는가? 대통령이 답답해서, 참다가 참다가 못 참아서 한마디 내뱉으면 승냥이떼처럼 대통령을 물고 뜯을 때 몸을 날려가며 그 이빨들을 대신 받아 낸 당선자가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아마 4년 후에 우리는, 이 나라는 과연 어떤 자리에 서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고 소속 의원들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dancing 2’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당원도 “창당 이후 제일 큰 실망이 말만 무성하고 실천이 빨리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정당 지지율 오르긴 다 틀렸다. 서민이 뽑아준 정당, 정부면 그에 맞는 정책을 펴야 한다”며 지도부 성토에 가세했다.
위기 탈출방법에 대한 열성당원들의 주장은 더욱 더 눈길을 끈다. ‘damiboni’라는 ID의 당원은 “우리가 노무현에게 2만불시대를 열어달라고 했는가, 국민화합과 경기활성화 하라고 과반을 넘겨주었는가? 2만불, 국민화합, 경제성장 이런 거 할 생각이었으면 한나라당으로 갔다. 칼자루 잡았을 때 힘껏 휘둘러 주길 간절히 바란다. 휘두르고 다음 선거에서 깨끗하게 심판받아라”고 일갈해 ‘경제-민생 우선’을 주장하는 대다수 당내 의원들과 현격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허장량’도 “국가보안법과 친일진상규명법, 공정거래법 특히 언론개혁법 등 개혁법안에 대해서 국민들을 직접 상대로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법안은 날치기나 경호권 발동하든 간에 무조건 통과시켜라. 차떼기당과 대화로써 상생한다는 건 말장난일 뿐이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를 해서든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에 대해 당내 컨센서스 형성이 과연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당권파의 한 의원은 이 같은 당내 분위기에 대해 “차기 전대에서 누가 당권을 잡더라도 당의 진로에 대한 백가쟁명식 논란이 가라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생력 있는 리더십의 구축이 해결되지 않는 한 열린우리당의 위기는 차기 대선까지 만성화될 것이란 우려마저 든다”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