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륭, 심상정 | ||
‘청넝쿨’이 ‘대학문화연구회’로 이름을 바꾼 것은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자락으로 캠퍼스를 옮긴 1975년부터였다. 모임을 시작했던 73학번 중에는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과 김충환 한나라당 국회의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문화연구회’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대문’이라는 약어로 불리기도 했고 ‘대문’의 영문표현인 ‘Gate’로 불리기도 했다. 78학번인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그때는 이름을 다 부르지 않고 줄여서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대학문화연구회’라는 이름보다는 ‘대문’이나 ‘Gate’가 더 익숙했다”고 말했다.
‘청넝쿨’을 처음 만들었던 73학번에는 한나라당 김충환 의원과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국방연구원 한용섭 박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 의원은 “우리가 모임을 만들을 때는 각 과에서 공부를 잘했던 73학번들이 모였지. 초기에 이 모임은 철학 문학 사상 등과 관련된 토론을 했어요. 당시에 학교에서 우리 모임을 불온한 조직으로 보고 ‘본부서클’로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이름을 바꾸게 됐죠”라고 전했다.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 모임이 본격적인 ‘학생운동조직’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일본을 통해 소개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대학 내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이 때부터 ‘대문’은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게 됐다.
심 의원은 “70년대 초반에 김충환 선배 등이 시작했던 ‘청넝쿨’과 75년 이후의 대학문화연구회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죠. 전자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엘리트 모임이었다면 후자는 학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이념서클이었어요. 실천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선배들하고도 많이 싸웠죠. 당시 본부서클로는 가장 규모도 컸고 유명했습니다”고 회상한다.
▲ 김민석, 원희룡 | ||
70~80년대 당시 ‘Gate’가 배출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면면은 이 서클이 당시 서울대 내에서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80년대 중반 해방이후 최초의 반국가 단체로 불린 ‘제헌의회(CA) 그룹’을 이끌었던 최민 열린우리당 중앙위원(78학번), 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됐던 고 박종철씨(85학번), 90년대 초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중앙위원장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백태웅씨(81학번) 등이 모두 ‘Gate’ 출신이기 때문이다.
또 학력고사 수석합격과 노동운동 경력으로 유명한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82학번)과 ‘한국노동운동의 대모’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78학번), ‘386 운동권’을 보통명사로 만든 장본인인 김민석 전 의원(82학번), 한나라당 3선 의원들이 주도해 만든 국가발전전략연구회 박종운 사무처장(81학번) 등이 모두 이 모임을 통해 ‘운동권’이 된 인물들이다.
박 처장은 “나는 2학년 때부터 이 모임에 참여해 학생운동을 지도했었다. 내가 이 서클에 들어갔을 당시 이 서클은 복학생이었던 최민 선배와 동기인 백태웅, 후배인 김민석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청넝쿨’ 시절 이 모임의 지도교수였던 최창규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나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등도 모임의 멤버로 통한다.
학계와 법조계의 인맥도 대단하다. 한인섭 서울대 교수, 국방연구원 한용섭 박사가 73학번 동기로 ‘청넝쿨’ 1기 멤버들이고 서울 남부지원 김문석 판사, 1985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대 민추위사건(일명 깃발사건)의 주요 멤버였던 안병용·황인상 변호사 등도 이 모임 출신이다. 특히 이 사건은 김근태 장관의 고문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Gate’는 80년대 초반 정부의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은 직후 3개의 작은 서클로 분화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와 관련, 박 처장은 “80년대에는 우리 모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했어요. 서클 내에 학생운동 지도자들과 학생회장들이 많았거든요. 84년에도 내가 언더조직의 대표였고 태웅이가 공개조직인 학도호국단 단장이었으니까. 우리 모임이 서울대 학생운동을 다 했던 거죠. 그러다보니 서클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3개 정도로 서클을 나눈거지. 그래도 다들 이름의 뒤에는 ‘문화연구회’라고 했고 사실상 하나의 서클로 움직였어요. 요즘도 가끔 모여 체육대회를 같이 합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