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 경조사에 얼굴을 비춰야하는 사람들은 “주말도 근무시간의 연장”이라며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한 아무개 씨(여·30)는 최근 황당한 해프닝을 겪었다. 어느 날 회사에 출근하니 자신의 책상을 비롯해 몇몇 사람 책상 위에 흰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얼마 전 가깝게 지내던 직장동료의 언니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냈던 축의금 봉투였다. 알고 보니 상사가 직장동료를 불러 “자기 결혼식도 아니고 가족 청첩장까지 돌리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화를 낸 것이었다.
한 씨는 “결국 이 소식을 들은 직장동료 부모님께서 ‘우리가 왜 거지취급을 받아야 하느냐’면서 회사관계자들의 축의금 봉투를 그대로 돌려보내셨다. 경조사비 스트레스 때문에 회사 내에서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종종 발생 한다”고 말했다.
경조사비는 궂은 일, 좋은 일을 서로 품앗이해서 치르자는 상부상조 정신에 기인한 풍속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상부상조 미풍양속은 사라진 지 오래. 품격 있는 사회인의 지위와 인맥을 관리하는 보험으로 변질된 경조사비 때문에 스트레스를 호소하거나 그로 인한 갈등을 겪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경조사비 스트레스는 ‘가계부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통계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2인 이상 가구가 경조사비로 지출한 금액이 한 달에 21만 1928원으로 집계된 것으로 나타났다. 경조사비 금액 수준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도 70%에 달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가계부담으로 인한 경조사비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사회적 체면을 고려해 경조사비를 내고 있다.
가족 간 경조사비는 더욱 치열한 눈치작전을 필요로 한다. 직장동료나 가까운 지인의 경조사비보다 금액이 커질 뿐만 아니라 양가에 보내는 경조사비가 차이가 날 경우 가족 간 화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은 “양가에 드리는 경조사 비용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부부가 맞벌이거나 홑벌이인 경우, 양가 부모의 경제적 차이 등 변수가 많기 때문에 액수를 정하기도 쉽지 않다”며 “이 경우 맞벌이든 혼자 벌든 경조사비 액수는 평등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 좋다. 전업주부라 해도 배우자는 수입의 반에 대한 권리가 있다. 형제 간 경제력이 차이가 난다면 무턱대고 보낼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 보낼 경조사비를 터놓고 얘기하며 조율하는 것도 필요한 자세”라고 당부했다.
“주말이 없어졌다”거나 “근무시간의 연장이다”라고 하는 것도 각종 경조사를 챙겨야 하는 직장인들이 호소하는 스트레스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박 아무개 씨(36)는 주말이면 2~3곳 정도 거래처 사람들 경조사에 얼굴을 비춰야한다. 박 씨는 “거래처 직원인지 임원인지에 따라 금액을 달리해 챙겨야 한다. 세법상 10만 원을 넘으면 처리해야할 서류가 복잡해진다”며 “홍보실이 따로 없어 영업직 직원들이 대신 거래처의 경조사를 챙기고 있어 업무의 연장이나 다름없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경조사비로 인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는 가계경제에 부담을 지지 않는 선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거나 자신만의 경조사비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경조사비 통장을 따로 만들어 관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경조사비가 나갈 때는 얼마 안 되는 돈처럼 보여도 한 달이나 1년간 모이면 상당한 금액이다. 경조사비 통장을 마련해 두면 매달 경조사비로 들어가는 돈은 얼마인지 누구에게 경조사비를 보냈는지 따로 기록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경사보다는 조사를 우선하겠다거나 받는 만큼 돌려주겠다는 자신만의 원칙을 세우는 것도 경조사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결혼식, 돌잔치 등이 많이 몰린 상황인데다 가계경제에 부담이 될 정도라면 조사를 우선 챙기는 것이다. 갑작스럽고 찾아오는 조사의 경우 금액보다는 성의가 큰 도움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축의금을 받았을 경우 봉투를 모아두거나 엑셀 파일로 정리해두면 축의금 금액을 책정하거나 참석여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금보다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선물의 경우 더욱 성의를 느낄 수도 있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작은혼례운동사업단 진민자 단장은 “공공시설을 활용한 결혼식이나 최소한의 예물, 합리적인 결혼식 등 허례허식과 거품을 빼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에게 보여주기식 경조사보다 결혼의 참뜻을 새겨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