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의 적>에 함께 출연해 감칠 맛 나는 연기와 걸쭉한 대사로 시선을 모았던 성지루(왼쪽)와 유해진. 이들은 근래 여러 작품에 서 그들만의 확실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네모 안 사진은 <살인 의 추억>에서 실감 연기로 ‘뜬’ 박노식. | ||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던 한 관객이 막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평을 늘어놓았다. 한창 신나게 수다를 떨던 이 관객, 인상 깊었던 영화 장면을 설명하던 중 답답함을 토로하는데….
이유인즉슨, 그 장면에 등장한 배우가 분명 어디선가 봤던 얼굴인데 도무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거다. 결국 ‘경이로운’ 연기력만을 호들갑스럽게 설명한 뒤에 “얼굴 보면 너도 아는 사람이야”라는 말로 대충 마무리를 한다.
이 ‘얼굴을 보면 아는 배우’들이 요즘 충무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바로 감칠맛 나는 조연배우들 얘기다. 한국영화계가 배우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는 아쉬움이 자주 표출되곤 하지만 이들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재미는 바로 맛깔스런 조연들의 연기가 아닐까. 영화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조연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영화에서는 주연보다 더 빛을 발하는 조연들도 있다.
이들의 연기도 그저 영화의 코믹적·구조적 요소를 더하는 데 그쳤던 전형적인 조연의 캐릭터에서 벗어나 한층 성장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편안한’ 마스크와 정감 가는 연기로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배우 유해진. 이름만 들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다. 그동안 간간이 배우 유해진에 대한 기사가 실려온 터이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은 낯설기만 한 것이 사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가 등장했던 장면 하나하나는 관객들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다. <광복절특사>에서 송윤아의 ‘새 애인’인 경찰 역으로 등장했던 그는 주연인 차승원과 설경구(송윤아의 본래 애인 역) 못지 않게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양아치나 사기꾼 부류의 역할만을 주로 맡았던 그가 경찰 역마저 그토록 실감나게 연기할 줄 어찌 알았겠나. 물론 ‘유해진표’ 경찰은 역시 어디가 달라도 달랐지만 말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용가리’와 <신라의 달밤>의 ‘조폭’, 특히 <공공의 적>에서의 칼잡이 ‘용만’은 배우 유해진의 연기세계를 확실히 보여준 캐릭터였다. <주유소 습격사건>을 보고 그의 연기에 반한 강우석 감독은 당시 ‘용만’ 역에 일찌감치 유해진을 점찍어 두고 미리 시나리오를 건넸을 정도.
“이, 이것은 장검인디 사람을 빌 때 사용하는 것이지라. 한번 와 보쇼. 아따 겁은… 이래 오면 목 따고, 가슴 따고, 배 따고, 시마이! 아따∼ 의외로 겁 많소. 이, 이것은 식칼과 사시미 칼이지라. 찌르는 칼입니다. 이… 요래 요래 하다가 재주도 부려주다가 쑤시고, 요놈도 쑤셔주고….” 이 인상 깊었던 대사와 신은 영화 팬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는 ‘명장면’이 됐다.
▲ 양아치 연기가 아주 돋보였던 유해진은 무협영화 <무사> 에서 검술 실력을 보이기도(위). 만능 사투리연기가 장기 인 성지루가 출연한 <선생 김봉두>. | ||
그는 애꿎게 살인누명을 뒤집어쓴 ‘어눌한’ 인물 백광호를 너무나도 실감나게 그려내 ‘과거’가 궁금해지게 만들 정도였다.
실제로 박노식은 생김새 때문에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기 일쑤였다고. 그러나 이제는 “그 외모 덕분에 백광호 역에 캐스팅된 것 같다”며 웃음을 보인다.
박노식은 <살인의 추억> 오디션 당시 직접 준비한 ‘츄리닝’과 고무신을 들고 갔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질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배고픈 연극무대를 전전한 경험이 바로 그 열정을 만들어준 밑바탕이다.
어릴 적부터 연기자를 꿈꾸었지만 ‘개성 강한’ 외모 때문에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젠 인터넷 사이트에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로 유명인이 됐다.
<선생 김봉두>에 출연했던 성지루도 잘 나가는 조연 중 한 명이다. 물론 차승원과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주를 이뤘지만 ‘최노인’ 역 변희봉과 노총각 소사를 맡은 성지루의 ‘양념연기’가 없었다면 영화의 맛이 한 등급 떨어졌을 것이란 평. 연극무대에서 14년간 갈고 닦은 연기력을 바탕으로 그는 이미 영화계에서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그는 만능 ‘사투리 연기’를 주무기로 삼을 정도로 다양한 지역색을 가진 조연을 연기해 왔다. <신라의 달밤>에서 고등학교 짱 ‘덕섭’, <공공의 적>에서 마약상 ‘대길’, <라이터를 켜라>의 깡패 ‘만수’, <가문의 영광>에서 김정은의 둘째 오빠 등이 그가 맡았던 역할. 6월4일부터 방영되는 드라마 <선녀와 사기꾼>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성지루의 팬들에겐 희소식이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까지나 조연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는 말자. 이미 송강호, 최민식, 박상면 등 개성 강한 한때의 조연들이 자신만의 연기세계를 일궈낸 전례가 있는 만큼 이들 역시 언젠가 자리를 박차고 더 높이 점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때가 오면 스크린을 보며 이들의 옛 양념연기를 오버랩해보는 것도 팬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