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리 포터> 시리즈의 주인공 ‘해리 포터’로 낙 점됐던 영국 아역배우 다니엘 레드클리프 | ||
96년 레오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클레어 데인즈, 97년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이 그랬고, 최근작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미녀 삼총사>의 파워걸 카메론 디아즈가 그와 야릇한 소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여성편력이 그저 잘난 레오의 섹시함 때문일까?
흔히 ‘동일화’라고 알려져 있는 인간 심리 증상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을 말한다. 배우들은 ‘동일화’를 주요한 연기 방법으로 사용한다. 대본을 처음 받은 뒤 연기자들이 맨 먼저 하는 일은 캐릭터와 자신의 닮은 부분과 다른 부분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런 뒤 자신 안의, 캐릭터와 닮은 부분을 극대화시킨다.
어쩌면 레오를 사랑하게 됐던 숱한 여배우들도 영화 속에서 레오를 사랑하고 있는 극중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을 맡았던 클레어 데인즈는 훗날 ‘레오를 사랑하고 있는 게 나 자신인지, 아니면 영화 속 캐릭터인지 종잡을 수 없어 심리적인 방황을 겪었노라’고 고백했다.
게다가 레오에게는 상대 여배우들로 하여금 영화 속 배역에 ‘깊이’ 몰입하도록 이끄는 탁월한 재능이 있다. 바꿔 말하면 레오의 여성편력은 그의 천부적인 섹시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실 캐릭터와 자기 정체성의 혼동은 배우들 사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열두 살 때인 지난 2001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주인공 ‘해리 포터’로 낙점됐던 영국 아역배우 다니엘 레드클리프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때때로 자신과 해리 포터를 혼동할 때가 있다고 고백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얼마 전 영화 <폴락>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추상주의 화가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던 잭슨 폴락을 연기했던 애드 해리스는 그후 한때 실생활에서도 고약한 폭음을 하기도 했고,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과 함께 출연했던 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그 뒤로 섹스중독증상을 보였다.
고전 할리우드의 명배우 말론 브란도는 또 다른 사례다. 말론 브란도가 보인 캐릭터에 대한 강한 집착과 동일시 현상은 스스로의 연기를 최고에 이르게 했지만 동시에 그의 인생을 망치는 주범이 되기도 했다.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스타덤에 오른 말론 브란도는 당시 주인공인 ‘마초’적인 노동자 스탠리 역을 연기한 뒤 술과 여자에 빠져 살기 시작한다. 그의 방탕한 사생활은 79년 <지옥의 묵시록>에서 악마적인 커츠 대령을 연기할 즈음에는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말론 브란도는 <지옥의 묵시록> 촬영장이었던 필리핀에서는 내내 술에 절어 지냈고, 훗날 당시 파괴된 내면을 지닌 커츠 대령과 자신이 동일인물인 듯 느껴졌다고 술회했다.
▲ 위 사진은 <살인의 추억> 아래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
하지만 배역과 혼동하는 게 아니라 배역에 몰입하는 것은 배우의 미덕. 우리 곁에도 송강호나 최민식, 전도연처럼 종종 영화에 따라 매번 전혀 다른 사람인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배우들도 있다.
송강호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부터 <복수는 나의 것>
그는 박찬욱 감독의 하드보일드 스릴러물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죽은 딸의 사체를 바라보는 장면을 찍던 날 하루동안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지냈다. 반면 코믹물
당시 송강호는 “의도적이진 않다. 단지 배역에 몰입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지만, 그만큼 그는 배역과 동일화해 자신의 연기를 이끌어내려 했던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상대역을 맡았던 김상경이 한동안 송강호를 멀리했던 것도 의도적인 ‘배역 동일화’로 볼 수 있다. 시골 형사 송강호와 티격태격해야 하는 서울 형사로 출연한 김상경은 촬영 초기 술 한잔하며 친해져보자는 송강호를 거듭 피해다니면서 영화 속에서처럼 송강호와 일부러 서먹하게 지내려 애썼다.
결국 이 때문에 섭섭해진 송강호가 그 섭섭함을 논두렁에서 김상경에게 감정 실린(?) 발차기를 날리면서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는 후문이 나돌았을 정도. 영화 속 캐릭터 간의 관계가 실제 배우들의 관계에 고스란히 묻어난 사례인 셈이다.
전도연 역시 어떤 성격의 영화와 배역이냐에 따라 상대 배우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 멜로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 출연했을 때 전도연은 당시만 해도 초보 영화배우였던 설경구를 카메라 밖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듯 애교로 대해 역시 ‘여우’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해피엔드>에서 이혼 직전의 남편 역을 맡은 최민식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지내기도 했다.
▲ <이도공간> | ||
<패왕별희>의 데이는 경극에서 초패왕의 애첩 초희 역을 맡은 뒤 초패왕 역을 맡은 친구를 실제 사랑하게 되는 인물. 게다가 여리고 의타적이었던 장국영은 <해피 투게더>에서 동성애자 역할을 맡은 뒤 심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장국영의 평소 모습 때문에 그가 자살했을 당시 홍콩 연예·일간지들은 그의 죽음 자체보다 장국영이 마지막 작품 <이도공간>의 캐릭터와 똑같이 투신자살을 했다는 점에 더 큰 놀라움을 드러냈다.
이처럼 뛰어난 배우가 배역에 대한 지나친 동일화 현상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화려한 인기 뒤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배우의 숙명인 셈이다.
지형태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