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학번 ‘빅3’ 임선동·조성민·손경수는 ‘우여곡절’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 공주고 박찬호 홍원기, 광주일고 박재홍 김종국, 부산고 염종석, 대전고 정민철, 경남상고 차명주, 동산고 송지만….’
왼쪽부터 정민철, 박찬호, 박재홍.
웬만한 야구팬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다. 이들이 바로 1973년생들로 이뤄진 황금의 92학번들이다. 1972년에 태어났지만 고교 시절 1년을 쉬어 92학번과 동기가 된 정민철 MBC스포츠+ 해설위원은 “당시 서울에 있는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가 ‘빅3’로 통했다. 그 가운데서도 임선동이 ‘제2의 선동열’로 기대를 모으면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며 “박찬호는 워낙 구속이 빨라 일찌감치 유명세를 탔고, 지방 고교 선수들은 주로 프로에 와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일까.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로 대표되는 초고교급 투수 삼총사를 둘러싼 영입전은 여전히 프로야구 스카우트 전쟁의 전설로 남아 있다. 서울 연고의 LG와 OB(현 두산)가 주사위 던지기로 1차지명 우선권을 가리던 때였는데, 세 선수를 두고 그야말로 치열한 눈치작전을 펼쳤다. OB가 먼저 손경수를 만나 계약금 1억 원에 구두 합의를 끝냈다. 손경수를 미리 포섭해놓으면, 주사위 던지기에서 져도 조성민이나 임선동 중 한 명은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경수의 아버지가 사인을 거부했다. 이후 OB는 LG가 5000만 원을 더 주고 손경수와 계약했다는 첩보를 들었다. OB는 다시 임선동을 만나 현금 3억 원이 든 가방을 건넸지만, 임선동의 어머니가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다”며 돈을 돌려보냈다. LG도 그 소식을 듣고 발 빠르게 1억 원을 더 얹은 4억 원을 임선동에게 제시했고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긴 후에도 곧바로 임선동을 지목했다. 그러자 OB는 결국 LG와 몰래 계약했다는 손경수를 지명했다.
전쟁은 치열했지만 모두가 패자였다. 임선동은 연세대로 진학했고, 졸업 후 우여곡절 끝에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정작 전성기는 현대에서 보냈다. OB로 간 손경수 역시 계약 문제로 속을 썩이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올리고 쓸쓸히 야구계를 떠났다. 오히려 서울 구단의 1차 지명을 피해 고려대로 진학한 조성민이 4년 뒤 자유롭게 요미우리와 계약해 일본에 진출했다. 다만 이후 부진과 개인사로 힘든 나날을 보내다 2013년 1월 세상을 등졌다. 임선동은 지난해부터 모교 연세대 야구부 코치를 맡고 있다.
그 사이 서울 지역의 불꽃 경쟁에서 한 발 떨어져 있던 다른 92학번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높이 떠오른 별은 단연 박찬호였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아시아 출신 최다승(126승) 투수. 한양대 재학 도중 미국으로 날아가 LA 다저스에 입단했고, 당시의 한국 선수들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무대에서 한 시즌 18승을 올렸다. ‘코리안 특급’이라는 단어 외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2012년에는 고향팀 한화로 돌아와 마지막 한 시즌을 보내고 은퇴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롯데에 입단한 염종석과 빙그레(현 한화)로 간 정민철도 데뷔 첫 해에 각각 17승(방어율 2.33)과 14승(방어율 2.48)을 올리며 신인왕 경쟁을 펼쳤다. 그 해의 승자는 염종석. 그러나 정민철은 더 오래 프로에 남아 역대 오른손 투수 최다승(162승)을 올렸다. 호타준족의 대명사였던 박재홍도 입단 첫 해 30홈런-30도루를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의 외야수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염종석은 현재 롯데 투수코치를 맡고 있고, 정민철과 박재홍은 해설위원으로 한솥밥을 먹고 있다. 동기생들 가운데 가장 오래 선수생활을 했던 넥센 송지만은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해 넥센 코치로 새 출발했다.
# 94학번 계약금부터 성적까지 ‘핵존심’
92학번들보다 딱 2년 늦게 태어난 94학번들도 선배들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다. 1975년에 태어난 선수들이 주축이지만, 배명고 김동주는 1976년 2월생으로 1년 먼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해 94학번들과 한데 묶였다. 신일고 김재현 조인성, 부산고 주형광, 충암고 신윤호, 광주일고 이호준, 성남고 김경태, 군산상고 신경현, 경남고 손인호, 경남상고 채종국 등이 고교 시절부터 명성을 날린 대표주자들이다.
92학번에 임선동과 조성민, 손경수가 있었다면, 94학번에서는 좌우 거포인 김재현과 김동주가 최고의 라이벌로 여겨졌다. 둘은 소속팀도 잠실 라이벌인 LG와 두산으로 갈라졌다. 김재현은 고교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하면서 계약금 91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 총액 1억 300만 원에 사인해 역대 고졸 신인 최고액을 경신했다. 입단 첫 해부터 서용빈, 유지현과 ‘신인 3총사’로 불리면서 고졸 신인 최초의 ‘20-20클럽’에 가입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잘생긴 외모와 남다른 스타성 덕분에 유독 많은 팬들 몰고 다니기도 했다.
김동주는 고려대 진학 후 1998년 OB에 입단하면서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 4억 5000만 원(2001년 SK 정상호가 타이기록)을 받았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은 액수다. 타고난 힘과 천재적인 타격 센스를 겸비한 덕분에 두산 부동의 4번타자로 활약하면서 ‘두목곰’ 등의 별명으로 통했다.
둘의 은퇴는 엇갈렸다. 김재현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1년 전부터 은퇴를 예고한 뒤 실제로 2010시즌을 끝으로 깨끗하게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요미우리 코치 연수와 방송사 해설위원을 거쳐 올해 한화 타격코치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김동주는 최근 2년간 2군에만 머물다 “다른 팀에서 더 뛰고 싶다”며 두산을 박차고 나왔지만, 끝내 새 소속팀을 찾지 못해 쓸쓸히 배트를 내려놓았다.
다른 대어들도 치열한 몸값 경쟁을 펼쳤다. 초고교급 투수로 통했던 신윤호는 1993년 11월 LG와 계약금 8800만 원, 연봉 1200만 원에 사인하면서 고졸선수 사상 최초로 몸값 1억 원을 돌파하는 역사를 썼다. 롯데에 입단한 주형광도 계약금 92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으로 총 1억 400만 원에 도장을 찍으면서 김재현 이전까지 짧은 기간이나마 고졸 신인 최고 금액을 기록했다. 심정수는 1994년 OB에 입단하면서 이들에 못 미치는 계약금 5100만 원을 받았지만, 프로에서 실력을 발휘하면서 2004시즌이 끝난 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4년 총액 60억 원의 FA(자유계약선수) ‘잭팟’을 터트렸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한 포수 조인성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계약금 4억 2000만 원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모두 은퇴한 92학번과 달리 94학번에는 아직 현역 선수 둘이 남아 있다. 이호준과 조인성이다. 이호준은 여전히 NC 타선의 중심 한 자리를 지키면서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끊임없는 진화와 철저한 자기관리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인성은 시범경기에서 주루플레이를 하다 허벅지 부상을 당해 주춤했지만, 빠른 복귀를 위해 재활에 힘쓰고 있다.
이 외의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 김경태는 SK, 손인호는 LG, 김재현과 신경현은 한화, 주형광은 롯데, 채종국은 넥센 등에서 코치로 몸담고 있다. 신윤호는 2008년 SK에서 은퇴해 사업을 하다 지난해 테스트 끝에 SK에 입단했지만 결국 지난 시즌 후 방출되고 말았다. 심정수는 2008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차세대 황금라인은? 메이저리그 직행 투타 류현진·강정호 ‘06학번’ 77학번과 81학번, 92학번과 94학번, 그리고 01학번. 이들의 뒤를 이을 만한 차기 황금세대는 과연 누가 있을까. 갈수록 한국 야구계를 뒤흔들 만한 신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에서 단연 돋보이는 후보군은 바로 06학번과 07학번이다. 1987년생 선수들이 주축인 06학번은 현역 메이저리거를 두 명이나 보유하고 있다. LA 다저스 류현진과 피츠버그 강정호가 그들이다. 류현진은 데뷔 첫 해부터 다승·방어율·탈삼진 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완성하면서 사상 최초로 최우수선수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데뷔 후 7년을 꽉 채운 뒤에는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거액을 받아내면서 한국 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첫 번째 선수가 됐다. LA 다저스에서도 지난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따냈다. 류현진보다 2년 늦게 해외 진출 자격을 얻은 강정호도 포스팅을 거쳐 첫 메이저리그 직행 야수로 기록됐다. 올해가 첫 시즌이다. 1988년 1월생인 두산 김현수도 이들과 같은 학번으로 역대 최연소 타격왕이자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 타자 가운데 한 명이다. 동기생인 두산 민병헌도 마찬가지. 이 외에도 SK 이재원, 롯데 황재균, 두산 양의지, 삼성 차우찬 등이 팀 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맹활약하고 있다. 이들보다 1년 후배인 07학번도 화려하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태어나 ‘서울올림픽 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01학번과 마찬가지로 2006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함께 일군 멤버들이 많다. 그 가운데 왼손 투수인 SK 김광현과 KIA 양현종은 팀 내 부동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둘은 지난 시즌이 끝난 뒤 나란히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했지만, 썩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다시 한국에 남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대표 주축 투수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롯데 간판타자 손아섭과 올해 군에 입대한 KIA 유격수 김선빈도 동기생이다. 양현종을 주축으로 한 몇몇 동기생들은 201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또 다른 동기생 이두환을 추모하기 위해 팬들과 함께 하는 자선 호프를 매년 개최하고 있을 만큼 우정도 깊다. [은] |
‘출범둥이’ 01학번 활약상 “우린 미다스의 손” 지난 2000년 8월 13일 캐나다 에드먼턴. 한국과 미국이 맞붙은 제19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한국이 연장 13회 접전 끝에 우승을 확정하는 순간, 마무리투수로 등판했던 부산고 추신수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1루에 있던 천안북일고 김태균, 2루를 지키던 부산고 정근우, 3루에 버티고 있던 경남고 이대호도 힘차게 마운드로 달려왔다. 한국 프로야구의 태동과 함께 태어난 1982년생 ‘출범둥이’들이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2000년대 이후에 입단한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는 ‘학번’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기가 어렵다. FA 제도가 도입되고 몸값이 높아지면서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에 뛰어 드는 선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 야구사에 가장 화려한 족적을 남긴 ‘01학번’들도 대부분 그렇다. 왼쪽부터 추신수, 오승환, 이대호. 01학번에는 현재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만 세 명이 포함돼 있다. 미국 텍사스 추신수, 일본 소프트뱅크 이대호, 한신 오승환이 그들이다. 추신수는 2000년 우승 당시 대회 최우수선수(MVP)와 최우수 왼손투수상을 거머쥐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었다. 고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시애틀, 클리블랜드, 신시내티 등에서 공·수·주를 겸비한 외야수로 맹활약했다. 2013시즌을 마친 뒤에는 텍사스와 7년간 총액 1억 3000만 달러(1420억여 원)라는 어마어마한 계약을 맺고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했다. 일본 소프트뱅크 이대호와 한신 오승환은 각각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4번타자와 마무리투수로 인정받은 뒤 일본에 진출했다. 2010년 이대호가 롯데에서 기록한 타격 7관왕과 9연속경기 홈런은 한동안 깨지기 어려울 만한 성과. 첫 소속팀 오릭스에서 성공적인 2년을 보낸 뒤 소프트뱅크로 더 높은 몸값을 받고 이적하기도 했다. 오승환 역시 삼성에서 한 시즌 최다 세이브(47)와 역대 최다 세이브(277) 기록을 모두 세운 채 일본으로 날아갔고, 한신에서도 마무리로 활약하면서 센트럴리그 구원왕에 올랐다. 물론 한화 김태균과 정근우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간판타자로 인정받았다. 정근우, 김강민. 게다가 넥센 손승락, 삼성 채태인, SK 김강민, 롯데 최준석 등 쟁쟁한 선수들 역시 01학번으로 묶인다. 팀 내에서 각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물론, 대부분 해외 진출이나 FA 계약을 통해 수십억 원의 몸값을 받고 있다. 정근우(4년 70억 원), 김강민(4년 56억 원) 등이 최근 FA로 성공한 대표적인 예다. 게다가 김태균과 손승락은 올 시즌이 끝나면 각각 두 번째와 첫 번째 FA를 앞두고 있다. 한국 야구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01학번은 실력과 이름값은 물론 금전적으로도 가장 풍족한, 진정한 ‘황금세대’로 기록될 듯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