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지의 성대담 이후 서갑숙은 이런 내용을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는 제목으로 출간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 ||
필자가 기획하고 진행한 ‘서갑숙-하재봉의 성(性)담론’은 당사자들의 항의(?)가 예견되어 있었다. 당시 필자는 중앙M&B에서 발행하는 여성지 <여성중앙21>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당시 서갑숙 선배(필자와는 중앙대학교 선후배 관계)의 매니저 M씨로부터 “갑숙 선배가 성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출판사 관계자들로부터 출판제의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여성지와 성(性)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으므로 귀가 솔깃했다. 그 자리에서 인터뷰를 제의했고, 의견을 나누던 중 선정적으로 꾸미지는 말자는 합의하에 대담을 주선하게 된 것이다.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하고 대담을 나눌 남성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성이라는 문제를 자주 입에 올린 유명인들에게 대담의도를 설명했으나 번번이 섭외에 실패했다. 결국 필자와 성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소설가이자 시인 하재봉 선배(그도 역시 고향 선배)를 섭외했다. 격의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기획의도를 설명하자 하 선배는 “나도 여성지에 근무해서 잘 알잖니? 어떻게 포장을 해도 성(性)이라는 문제는 활자화되면 선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이건 기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제목을 ‘하재봉-서갑숙의 성담론’으로 해주고, 최종 원고를 꼭 한 번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 ||
대담은 3시간 가량 진행됐다. 카페를 통째로 빌려준 주인이 “이제는 다른 손님도 받아야 하는 시간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음담패설이나 친구들끼리 킥킥대며 나누던 이야기들이 아니라 진지하게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성을 가꾸어가자는 게 결론이었다. 매우 자연스런 대화였고 필자도 어둡게만(?) 바라보던 성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결국 이틀 밤을 꼬박 세워 원고를 작성한 뒤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에 참가해준 하 선배에게 전해줬다. 그는 꼼꼼히 원고를 본 후 빼야 할 부분과 첨가해야 할 부분 등을 표시해서 나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젠 됐다싶어 잡지식 문장으로 바꾼 후 데스크에게 넘겨주었는데 데스크는 한참동안 원고를 읽은 후 “별 내용이 없네. 충격적인 게 별로 없네”라고 했다. 이미 예상한 데스크의 평가였다. 그가 원하는 충격적인 내용은 필자와 하재봉이 이미 검열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조각조각 읽다보면 충격적인 내용도 많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잡지가 나왔다. 서갑숙 선배는 “내 이야기만 제대로 전달한다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재봉 선배는 이미 원고를 봤기 때문에 ‘사후 수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감이 끝난 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 책 출간 후 인터뷰하는 서갑숙. | ||
데스크의 약속과는 달리 제목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하 선배에게는 “모두 내 불찰이다. 끝까지 표지와 포스터를 확인했어야 하는데”라며 백배사죄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서갑숙 선배는 매니저를 보내 “명예훼손으로 소송하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았다. 데스크와 필자가 ‘사후수습’에 나섰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옥신각신을 한 끝에 “내용에는 이상이 없지 않느냐?”로 물었고, 서 선배측은 “내용은 문제가 없다”라면서 “그런데 제목에 문제가 있다. 이래서 책으로 내려고 했던 건데”라며 말끝을 흘렸다.
필자는 별 생각 없이 “그럼 책을 내세요”라고 했고, 서 선배는 “이곳 출판부에서도 책을 내자고 전화가 왔다”면서 “그렇게라도 내 생각을 밝혀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던진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다.
이제는 두 사람과 그때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울 정도로 화해를 했지만 필자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두 선배에게는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