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생 역을 맡아 열연한 감우성(왼쪽)과 공길 역을 맡은 이준기. | ||
그런데 관객들은 외면하지 않는 수준을 벗어나 열광하고 있다. 겨울방학 시즌을 기다린 대작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며 흥행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것도 순수한 입소문에 힘입어서 말이다. 게다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관람 이후 정치권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 정도면 하나의 사회적인 신드롬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왕의 남자>가 많은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얻어낸 가장 큰 원동력은 한국인 고유의 취향인 ‘풍자와 해학’을 주요한 메타포로 이용했다는 부분이다.
최근 들어 ‘풍자와 해학’은 지난날의 유산 정도로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 풍자 코미디가 인기를 끌었으나 최근에는 극장식 개그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풍자 코미디가 익숙한 30대 이상 관객들은 물론이고 가벼운 개그에 길들여진 젊은 관객들까지 ‘풍자와 해학’에 열광하며 <왕의 남자>의 대박 행진이 가능해진 것이다.
▲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줄타기 장면. 장생과 공길이 훨훨 하늘로 솟아오른다. | ||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도 장생과 공길 같은 진정한 광대는 나타나지 않은 듯하다. 대통령을 위시한 권력 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풍자와 해악’이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 물론 과거 군사정권 시절보다 많이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가장 엄격한 통제가 따르는 표현 수위는 권력 집단에 대한 묘사다. 장생과 공길을 품은 영화 속 연산군과 같은 권력자는 아직도 머나먼 ‘현실’일 수밖에 없다.
영화 <왕의 남자>는 제목부터 ‘동성애’ 코드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동성애를 주요 코드로 이용했다는 부분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상당한 부담감이 되었다고 한다. 관객들에게 괜한 불쾌감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
실제 한국 사회가 동성애에 대해 일정 부분 반감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지난 2000년 커밍아웃하면서 화제가 된 홍석천이 세인들의 편견 어린 시선으로 오랜 기간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했음이 이를 대변한다. 영화 <로드무비>를 통해 스크린이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지만 흥행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 동성애에 대한 관객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동성애 코드의 CF가 안방을 공략하는 가운데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영화가 동성애 코드를 주변 소재로 활용해왔다. 그리곤 결국 <왕의 남자>의 대박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이야기’를 갈망하는 요즘 분위기에서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동성애 커플의 등장이 빈번해질 것이기 때문.
▲ 연산군(왼쪽)은 천한 광대 공길의 놀이판을 보고 애첩 장녹수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또다른 감정을 품게 된다. | ||
관객들이 <왕의 남자>에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배우들의 열연에 있다. 그 중심에는 신인 ‘공길’ 이준기가 자리한다. 여성스러운 외모로 연산군의 동성 연인으로 출연한 이준기는 이번 영화를 통해 단번에 스타로 등극했다. 최근 출연 중인 드라마 <마이걸>의 촬영 장소에 여성 팬들이 몰려들어 원만한 촬영이 어려울 정도로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관계자들은 이준기의 여성스러운 외모보다 뛰어난 연기력 자체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다. 장생과 연산군 사이에서 연민과 회한을 느끼는 공길의 내면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한 강성연 역시 좋은 점수를 받았다. 비록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새로운 개념의 ‘장녹수’를 표현하는 창조적인 연기로 박수 갈채를 받고 있다. 워낙에 연기파 배우로 알려져 있던 감우성과 정진영의 연기는 이번 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명불허전임을 증명해냈다.
<왕의 남자> 출연진은 하나같이 ‘스타’보다는 ‘배우’로 불리는 이들이다. 관객 동원력을 인정받은 스타가 아닌 연기력이 탄탄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 다소 위험한 접근이지만 진정한 연기력을 관객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장생’을 장동건, ‘공길’을 원빈, ‘연산군’을 배용준, ‘장녹수’를 이영애가 맡았다면 어떤 색깔의 <왕의 남자>가 만들어졌을까 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물론 이들의 가세로 영화는 더욱 탄실하고 홍보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관객들이 열광하는 색채의 <왕의 남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신민섭 기자 ksim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