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진난만한 저 표정, 일흔을 넘긴 신구만이 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인터뷰 중 몇 차례나 “늙은이가 뭐…”라며 겸손함을 보였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창창한 청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기회만 있다면 1백 살이 될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 배우의 연기 인생을 어찌 단 몇 줄의 글로 풀 수 있으랴. 다만 오랫 동안 보아온 한 대배우의 모습을 화면이 아닌 가까이서 마주보고 그의 얘기를 들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을 잠시나마 느끼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먼저 지난해 말
프로필을 찾아보기 전까지 기자도 그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신구는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하나가 되었다. 실물을 본 이들이 모두들 “왜 그렇게 늙지 않느냐”고 말할 만큼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나이까지 연기를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비단 체력만 가지고도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자는 그와 얘기를 나누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짧은 소견이지만 여기엔 그의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려 본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트콤에 도전한데 이어 그는 지난 연말 뜻 깊은 또 하나의 도전을 이뤄냈다. 바로 어린이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에 출연한 일이다. 극중에서 스크루지 영감 역을 연기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고 한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가족뮤지컬에 출연한 건 처음”이라며 그는 9개월 된 손자 지호 얘기를 들려주었다. 서른아홉 살의 늦은 나이에 결혼했던 신구는 지난해 첫 손자를 얻었다고 한다.
“지금이 한참 예쁠 때지. 주말마다 집에 놀러오는데 지호 덕에 내가 얻는 게 많아요. 웃음도 많아졌고. 내가 손자를 봐주는 게 아니라 내가 기쁨을 얻는 거지, 허허.”
이 뮤지컬이 몇 번째 출연작인지 세기도 힘들 만큼 신구의 연기 경력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얼추 뽑은 프로필만 해도 A4용지 한 장을 빼곡히 채울 정도. 지난 1962년 연극 <소>를 통해 데뷔한 그는 이후 10년 동안 연극무대에서만 활동했다. 그가 배우가 된 ‘계기’를 묻자 신구는 “너무 오래 된 일이라 뭐…”라며 웃음을 보였다.
신구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곧잘 했던 그는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명문이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시험에 떨어지며 좌절을 겪게 된다. 2차로 진학한 곳이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였다.
신구는 “그렇게 대학에 가긴 했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아 군대를 가버렸어. 제대한 뒤 곰곰 생각해 보니 문득 연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어릴 때 TV 드라마 보면서 배우가 좋아 보이더라구. 학교는 결국 중퇴했고 처음에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셔서 많이 힘들었지”라고 설명한다.
어렵게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낸 신구는 62년 극단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연극배우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잡일과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성실하게 노력한 덕에 꾸준히 무대에는 설 수 있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10년을 ‘버티다가’ 결국 72년 방송국으로 ‘진출’해 드라마 <허생전>으로 방송 데뷔를 하게 된다.
“요즘 젊은 애들 다 잘하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관리를 잘하고 그러기 때문에 다 그렇게 활동을 하는 거지. 요즘 배우들 보면 애들이 전부 잘 생겼어. 외모도 그렇고 체격도 그렇고. 연기뿐 아니라 춤이나 노래까지 모두 잘하고. 우리 때는 그렇게 삼박자가 다 갖춰진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 요즘 애들은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시각적, 청각적으로 접하는 게 많아서인지 재능이 많은 것 같아.”
그는 촬영장에서 후배들에게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후배가 조언을 구해올 때만 한마디씩 해주는 정도라고. 가까이서 만나 얘기해 본 그는 화면 속에서 보았던 코믹한 이미지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편안하고 재미있는 할아버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평소엔 매우 과묵한 편이라고 한다.
“난 유머 있고 위트 있는 사람이 참 부러워. 내가 그렇질 못하거든. 드라마에서 그렇게 보여지는 건 극중 상황과 대본이 다 그려져 있으니까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그걸 따라가는 거야.”
하지만 같은 대사라도 신구가 하면 다르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너나 걱정하세요’와 같은 CF 속 카피가 히트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신구의 맛깔스런 어투 때문에 가능했던 것. 겉으론 딱딱하고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한마디로 좌중을 휘어잡는 의외성이 바로 그의 코믹함의 진수. 여기엔 그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 같았다.
“CF 찍을 때도 스무 가지 넘게 다양한 뉘앙스로 했는데 그 중에 하나를 고른 거야. 난 못 느끼는데 내 안에 그런 코믹함이 내재돼 있는 건지도 몰라, 허허. ‘니들이 게맛을 알아’ 하고 나서는 어린이 팬들이 와서 아는 척하고 사인도 부탁하고 그러는데 그게 참 좋더라구. 그전까지는 내 이미지가 사람들이 다가오기 좀 힘들어하는 느낌이었나봐. 그런 면에서 지금 참 행복해(웃음)”.
노주현 이홍렬 등과 함께 출연했던 2002년의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신구는 주현과 홍렬의 아버지 ‘노구’ 역을 맡았었다. 보약을 밝히고, 나이에 비해 아주 정정하고, 특히 뜀박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고집이 센 아버지였다. 지금도 시트콤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될 만큼 ‘노구’의 캐릭터는 코믹했다. 신구는 처음 섭외가 들어왔을 때 시트콤이라고 해서 부담을 갖진 않았다고 한다. 나름의 ‘코미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웃긴다는 건 참 힘든 일이야. 내 생각은 그래. 캐릭터가 너무 과장되거나 말과 행동을 오버하면 거부감이 들고 보는 사람이 껄끄러워. 그냥 상황에 맞는 정도로만 절제해 주는 게 맞는 거라고 봐.”
신구는 자신의 수많은 출연작 중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당시 신구는 복수(양동근 역)의 아버지로 등장해 부자간의 애틋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기자가 “그 캐릭터는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자 “젊은 애들이 잘했고 난 그 속에 그냥 끼어든 거지”라며 또다시 몸을 낮춘다.
앞으로 신구의 꿈은 무엇일까. 일흔 살의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 신구에게는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듯했다. 소주 없이는 못 살 정도로 술을 좋아하지만, 한편 매일같이 운동으로 체력관리를 하고 있는 것은 힘이 다하는 그날까지 연기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술은 뭐 평생 먹는 거지, 허허. 난 집사람한테 그래. 술 마시려고 운동하는 거라고.(웃음) 난 예순 넘어서부터는 나이를 잊었어. 누가 나이 물어보면 세 봐야 해. 그저 바람이 있다면 날 불러주는 그날까지 열심히 연기하고 싶은 것뿐이야. 여든, 아흔, 뭐 백 살이 될 때까지도 연기할 수 있다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