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왕의 남자>에서 장생역을 맡은 감우성의 대역이었던 줄타기 1인자 권원태씨. 엄밀히 말하면 감우성씨가 권원태씨의 대역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진제공=안성시 공보실 | ||
“나는 광대예요. 요즘 나한테 와서 모두들 ‘선생님’ 그러는데 정말 부담스러워요. 내가 부족한데 선생은 무슨 선생이에요.”
올해로 30년째 줄꾼으로 살고 있는 권원태씨(40)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는 영화 <왕의 남자>에서 장생(감우성 분)의 대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영화가 대히트를 기록하며 권씨도 감우성 못지않은 스타가 되었다. 그를 만난 안성시립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 사무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방송출연 및 인터뷰 스케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영화로 인해 자신이 주목받고 있는 것에 대해 권씨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의 표현대로 ‘광대’로서 살아온 지난 30년은 지금 한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에 들뜰 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몇몇 사람들로 인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지만 우리의 소중한 줄타기 민속공연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남사당패가 하는 공연 중 ‘어름’이 바로 줄타기를 가리키는 말. 우리나라에 어느 때부터 줄타기가 있었는지 그 연원을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줄타기에 대한 기록 중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후한시대 하정일에 큰 줄을 양 기둥에 잡아매어 거리를 수장되게 하고 두 기녀로 하여금 줄 위에서 춤추게 하면 만나면서 춤추되 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 외 여러 문헌을 통해 예전의 줄타기가 궁중연회나 외국 사신의 방문 때 보여주거나 양반집 잔치에 불려 다니기도 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줄꾼은 고작 5~6명 정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된 삶을 살아야 하다 보니 이 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든 상황이다. 권씨의 경우에도 열 살 때 줄타기를 배우기 시작해 30년 동안 줄꾼으로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숱하게 겪었다고 한다.
그가 줄타기를 배우게 된 것은 농악대에서 활동하던 어머니의 권유 때문. 그러나 한창 또래들과 어울려 놀 나이에 줄을 타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권씨는 “사춘기 때 마음고생 했던 걸 어떻게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있겠나. 나는 광대로서 밑바닥부터 살아왔다. 흔히 하는 말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거쳐왔다”며 웃음을 보였다.
▲ 권원태씨. 사진=이종현 기자 | ||
언제나 사람이 붐비는 공연장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이들에게는 남다른 직업병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시끄러운 곳에만 있다 보니 평소엔 사람이 없고 조용한 곳만 찾게 된다는 것. 권씨는 “내가 아이한테 미안한 것은 한 번도 놀이동산엘 데려가 보지 못했다는 거다. 시끄럽고 사람 많은 데는 정말 가기가 싫다. 나는 차를 타도 음악을 틀어놓지 않는다”며 웃음을 보였다.
팔도강산을 누비고 다니는 것은 이들 광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삶이다. 권씨도 열 살 때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 지난 2004년 세계줄타기대회에서 우승한 뒤로는 해외공연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요즘 유명세를 떨치자 얼마 전엔 일본의 동경TV에서도 이곳을 방문해 권씨의 줄 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가기도 했다. 권씨는 “우리는 네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주소만 보면 ‘통밥’으로 대충 어디쯤이란 게 감으로 온다”며 웃음을 보였다.
‘외줄인생’을 걷고 있는 권원태씨는 앞으로 10년 안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한다. 줄타기 분야의 1인자가 되었지만 이미 사양직업이 되어버린 광대로서 그는 후배들이나마 탄탄한 지원 속에 이 일을 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수십억씩 돈으로 지원을 해줄 게 아니라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의 문화를 익힐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서양음악만 배울 게 아니라 음악수업에 다양한 민속음악을 접하고 익힐 수 있도록 하면 이들이 커서 다른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또 외국에 나가더라도 우리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자연스레 마음속에 갖게 되지 않겠는가.”
조성아 기자 zza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