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음란서생> 포스터 사진. 한석규(가운데)와 이범수는 영화 속에서 ‘야설 작가’ 윤서와 ‘춘화 화가’ 광헌으로 등장한다. | ||
조선시대의 음란소설 작가는 오늘날에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야설(야한소설의 약자)’이라 불리는 ‘난잡한 책’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야설 작가들은 어떤 이들일까. 2006년을 살아가는 ‘윤서의 후예들’을 만나본다.
영화 ‘음란서생’에서 윤서가 처음 ‘난잡한 책’을 접한 게 된 계기는 다른 일로 찾았던 저잣거리 유기전에서다. 그곳이 은밀하게 음란소설이 제작·유통되는 장소였던 것. 기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야설의 세계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요즘 야설의 제작 및 공급은 30여 곳의 성인 콘텐츠 제작업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각각의 성인 콘텐츠 제작업체들이 10여 명의 야설 작가들을 고용해 꾸준히 야설을 생산해내는 것.
접근은 쉽지 않았다. 지난해 벌어진 검찰의 대대적인 단속 이후 대부분의 업체들이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 심지어 한 업체에서는 “성폭행 관련 사건이 급증하는 최근 분위기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에게 화살이 집중될 수 있다”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어렵게 모바일 콘텐츠를 제작하는 A 업체로부터 취재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야설도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부탁이 덧붙여졌다. 이런 부탁의 말을 먼저 건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요즘 야설 업계가 위기다. 영화 ‘음란서생’에서 음란소설 관계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사안은 바로 의금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의 단속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검찰의 단속이 벌어질 때마다 야설업계가 요동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벌어진 모바일 성인 콘텐츠에 대한 검찰의 대대적인 단속 이후 야설 업계가 잔뜩 얼어붙었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나친 제약에 있다. 동성애, 근친상간, 혼음 등 음란물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이 야설에서는 일체 금지돼 있다. 검찰의 엄격한 단속 규정으로 주요 소재가 1차적으로 걸러진 상황에서 야설을 서비스하는 이동통신사(이통사)의 자체 검열까지 통과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이미 영화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확보돼 하나의 흥행 요소로 떠오른 동성애, 근친상간 등의 소재가 야설에서는 여전히 금지 목록인 셈. 따라서 요즘 야설은 ‘불륜’을 큰 축으로 유부녀, 여대생, 스튜어디스 등이 주된 소재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지금 같진 않았다. 야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은 PC통신이 한창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중반부터였고 전성기는 웹 사이트에서 야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에는 동성애나 근친상간을 소재로 한 야설이 대부분이었고 하나같이 난잡한 관계로 얽힌 이들의 성관계가 주된 스토리 라인이었다. 심지어 ‘강간’도 주요 소재였을 정도다.
문제는 야설의 유통망이 웹 사이트에서 모바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단말기의 성능이 좋지 않던 모바일 서비스 초기 시절 야설은 최고의 모바일 성인콘텐츠였다. 동영상이나 사진 서비스의 경우 단말기 성능이 좋지 않아 원활한 서비스가 어려웠지만 야설은 간단한 텍스트 파일 위주이기 때문이다.
▲ 영화 <음란서생>에서 ‘야설작가’ 윤서(한석규 분)가 소설 속에서 새로 선보일 각종 ‘체위’를 실험하고 있다. | ||
다행히 매출은 여전히 좋은 편이다. 모바일 야설의 경우 월 매출이 7억~8억 원 수준으로 연간 매출이 100억 원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전체 모바일 성인콘텐츠 시장의 20~30% 수준으로 기획물을 제외하면 가장 각광받는 콘텐츠가 바로 야설인 셈이다. 그만큼 마니아 층이 확고하다는 얘기.
그렇다면 요즘 활동하는 야설 작가들은 어떤 이들일까. 야설 작가들 역시 야설 업계의 변화와 그 추이를 같이 하고 있다. A 업체의 관계자는 “요즘 작가들은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야설을 사이드 잡으로 삼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며 “예전에는 문단에 등단한 소설가 출신의 야설 작가도 있었으나 요즘에는 문학 계통 출신 야설 작가가 거의 없다”고 얘기한다.
A 업체 소속 야설 작가들을 그 예로 야설 작가의 평균 모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 11명의 소속 야설 작가의 성별은 남성 여덟 명에 여성 세 명. 이 가운데 10명이 ‘투잡스족’으로 보습학원 강사, 은행원, 구성작가, 기자, 웹디자이너 등의 다양한 직업군들이다. 단 한 명만 전업 야설작가일 뿐이다.
웹 사이트가 주된 유통망일 당시에는 소위 스타 작가들이 존재했다. 영화 ‘음란서생’에서 1, 2위 자리를 다투던 ‘인봉거사’와 ‘추월색’과 같은 스타 작가가 존재했다는 얘기. 스타 작가의 상당수는 실제 문학가 출신이다. 예를 들어 탄탄한 스토리 라인으로 마니아층을 확보한 ‘황인수’(필명) 야설 작가의 경우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출신. 웹사이트에선 이런 스타 작가에게 더 높은 원고료를 책정해줬고 때에 따라 런닝 개런티도 지급했다. 그렇다고 ‘음란서생’의 윤서처럼 우연히 접한 야설의 매력에 빠져 야설 작가가 된 이들은 거의 없다. 대신 실질적인 수입원이 절실한 몇몇 문인들이 일반 소설과 야설을 동시에 쓰는 것이다.
그런데 유통망이 모바일로 옮겨 가면서 이런 흐름이 무너졌다. 이는 대량생산을 모토로 하는 대기업의 경영 시스템에 기인한다. 요즘 야설은 모바일 성인 콘텐츠 제작업체에서 생산되는데 일괄적으로 원고료가 지급된다. 야설 한 편의 분량은 평균 A4 용지 6~7매 정도로 원고료는 평균 15만 원.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어 신인 급은 8만~10만 원, 베테랑 작가는 20만 원가량을 받는다. 편수 또한 한 주에 1편 정도로 제한해 베테랑 작가라 해도 월수입이 100만원을 넘지 못한다. 별도의 런닝 개런티도 없어 전업 야설작가 되기가 더더욱 어려워졌다.
물론 방법은 있다. 동시에 여러 업체에 야설을 공급하는 것. 월 100만 원 정도의 원고료를 주는 업체 몇 곳과 중복 계약을 하면 월수입이 수백만 원 대에 이른다. 실제 몇몇 전문 야설 작가들이 이렇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스타 작가라는 개념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모바일에 서비스되는 야설의 경우 작가의 이름이 아예 기재되지 않는다. 스타 작가란 재미있게 본 작품의 작가를 기억했다 그의 차기작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생겨나는 것인데 모바일 야설의 경우 작가 이름이 아예 기재되지 않아 스타 작가의 탄생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대량 생산이란 비슷한 수준의 제품을 양산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월등한 품질의 몇몇 제품은 불량처리 대상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야설이 점차 하향평준화 되어 가고 있다.
신민섭 기자 ksim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