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배우가 배우를 인터뷰 한다는 것’에 대해 정경순은 나름의 지론을 갖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중함이 타이틀대로 단지 ‘잡담’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바로 ‘배우’ 정경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을 인터뷰하기 위해 꼬박 3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개런티 너무 적게 받았나봐”라며 털털한 웃음을 보였다. 정경순과의 만남은 정겹고도 즐거웠다.
“어머, 나 원로에 꼈네. 어떡하면 좋아 하하하.”
기자가 먼저 이 인터뷰 코너의 성격에 대해 설명을 하자 돌아온 정경순의 대답이었다. 이 코너에는 경력이 오래된 배우, 가수 등의 방송인 혹은 주연보다 더 빛을 발하는 조연들이 등장해 왔다. 지금껏 ‘모셨던’ 이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곁들이니까 정경순은 자신이 벌써 그런 ‘원로급’이 되었느냐며 기자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크게 웃어젖힌다.
정경순은 지난 3월부터 채널 CGV에서 <정경순의 영화잡담>을 진행하고 있다. ‘초대’ 게스트였던 공형진을 비롯해 문소리 추상미 정두홍 감독 강신일 류승완 감독 심혜진 등 그간 출연했던 이들 모두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쟁쟁한 스타들. 한 업계에 몸담고 있는 정경순과의 인터뷰는 이들에게 맘 편한 수다와도 같을 것이다. 이는 제작진이 정경순을 인터뷰어로 내세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청률이 계속 올라가고 있대요. 그렇다고 내가 뭐 확 뜨는 것은 원하지 않고….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니까 기분 좋죠. 사실 처음에는 왜 나한테 MC 섭외 제의가 왔는지 의아했어요. 예전에 두세 명 정도 같이 진행하는 토크쇼는 해봤지만 내 이름을 단독으로 걸고 하는 거라니까 겁이 확 나기도 했어요.(웃음)”
고민하던 정경순은 ‘한번 해보자. 뭐 하다가 잘못 하면 MC를 교체하라’며 특유의 화통한 성격다운 답을 내주었다. 그리고 이왕 하기로 나선 정경순은 배우 섭외는 물론, 방송 내용, 편집에까지 적극적인 가담을 하고 있다. 기존의 토크쇼 전문 MC들보다 더 팔을 걷어붙이고 열의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내가 언니 같고 누나 같고, 뭐 아줌마 같으니까 배우들이 좀 더 편하게 말을 하는 것 같아요. 나왔던 친구들이 이렇게 편한 인터뷰는 처음 해봤다고 그러기도 하고. 난 그랬어요. 사생활은 절대 안 묻는다고. 사실 배우들 삶이 사람들 생각하는 것만큼 재밌지가 않거든요. 그들의 사생활, 내가 궁금하지 않으니까 별로 묻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내가 안 묻는다고 했는데도 말하다 보면 알아서 다 얘기하더라구.(웃음)”
하지만 ‘섭외’ 문제는 쉽지 않다고 한다. “요즘 배우들은 영화 개봉 때만 ‘홍보 인터뷰’를 하게 마련인데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생각이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정경순은 “간혹 영화 개봉 때 출연할 수 없냐며 연락이 오지만 우린 앞으로 장미희 씨처럼 현재 특별한 활동을 안 해도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을 인터뷰 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 영화 <세기말>, 영화 <창>, 드라마 <위험한 사랑>, 드라마 <토지>. (위에서부터) | ||
“그때 난 한국을 떠나고 싶었지. 내가 원하지 않던 과를 가고 대학 생활이 별로 행복하지 않았어요. 학력고사 보고 재수를 하기 싫으니 점수에 맞춰서 간 거였으니까.(웃음)”
대학 시절 아무런 경험 없이 우연히 서게 된 연극으로 상을 받은 뒤 주변의 권유와 추천으로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정경순은 “결혼도 늦게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다행히 어머니가 이해하고 밀어주셨다”며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정경순은 지난 2003년 한국 나이로 마흔 한 살에 현재 홍익대 미대 겸임교수 겸 디자인 사업을 하고 있는 이건만 씨와 결혼했다).
생각보다 긴 5년 반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하게 된 정경순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 ‘픽업’돼 영화에도 발을 딛게 된다. 영화 <창>과 <태백산맥>으로 주목을 받게 되면서 받은 조연상 트로피만 여섯 개. 물론 힘든 시절, 고비도 없진 않았다.
“언젠간 일이 풀리겠지… 그러면서 살아왔어요. 낙천적인 생각으로 부딪히려고요. 또 준비된 배우라면 어떤 역할이 와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어요. 큰 좌절과 회의도 톱스타나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나 하는 거지, 뭐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게 없었어요.”
30대에 이르러서야 배우 생활을 시작한 정경순이 연기해 온 배역은 주로 ‘센’ 이미지의 역할이었다. <태백산맥>의 ‘죽산댁’이나 <창>의 ‘미숙’이나 최근작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이름도 없는 ‘닭꼬치 아줌마’역 등등. 여배우들이 나이가 들면서 배역의 한계를 느낀다는 말을 그도 실감하는 듯했다. 정경순의 솔직한 고백은 여느 배우들의 그것보다 더욱 와 닿았다.
“영화나 드라마가 10~20대 위주로 만들어지면서 점점 역할이 없어지죠. 이나영, 전지현 이런 애들이 나와야 젊은 친구들이 보러가지.(웃음) 우리 어릴 때도 문희 씨 보러 영화관에 갔었잖아요. 그건 자연스런 거야. 제작자들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날 멜로 주인공으로 써 봐요. 그게 되겠어? 안되지. 난 앞으로 희망적이에요. 그간 한 5~6년 동안 일이 좀 뜸했는데 이 시기를 잘 넘겼으니 앞으론 엄마역도 자주 하게 되지 않을까요?(웃음)”
조연상 트로피만 여러 개 갖고 있는 정경순에게 주연상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물었다. “그럼요, 없을 수 없지”라며 첫 마디를 꺼낸 그는 이어 ‘상’이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실 상 받아서 훌륭한 배우라는 공식은 없어요. 그런데 대개 배우들보다 감독들이 상에 더 집착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감독들은 큰 상을 하나 받아 놓으면 왠지 그런 작품성 있는 영화만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감독은 나는 새처럼 영혼이 자유로워야 하는 데 거기에 연연하게 되면 오히려 해가 되죠.”
정경순은 “언젠가 멋있는 사랑 말고 생생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하는 멜로 영화를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털어놨다.
그에게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언젠가 주연상도 꼭 타세요”라고 말이다. 그의 반응이 재밌다. “오케이! ‘정경순 씨가 꼭 주연상을 탔으면 좋겠다’라고 기사에 써줘. 하하.”
[정경순 프로필]
1963년 9월15일 생. 성신여자 대학교 졸.
1997년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등 수상. 영화 <동해물과 백두산이> <세기말> <정사> <창> <축제> <태백산맥> 드라마 <위험한 사랑> <토지> <메디컬 센터> <은실이> <여고동창생> 등 다수.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