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9단(왼쪽)과 조치훈 9단의 대결은 만남 자체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역사적 기념대국의 현장은 7월 26일 오후 2시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 2층 대회장이 ‘현장 체험’을 위해 찾아온 바둑 팬들을 위한 공개해설장이었다. 조훈현 9단은 모시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쥘부채와 소품을 담은 조그만 손가방을 들고 입장했고, 조치훈 9단은 넥타이까지 단정히 맨 회색 정장. 길게 기른 머리와 콧수염, 검고 굵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조훈현 9단의 얼굴은 모시옷만큼이나 밝고 희었고, 조치훈 9단의 얼굴은 잘 그을린 색깔로 건강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다소 기괴하게 보이기도 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조치훈 9단이었기에 그 느낌은 탈속의 도인이었다. 조치훈 9단은 골프가 싱글이라는데, 필드에 자주 나가는 것 같았다.
조훈현 9단은 의자에 올라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맹금류의 눈길로 바둑판을 쏘아보고 있었다. 조훈현 9단으로서는 평상시처럼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것이었겠지만, 워낙 눈빛이 날카로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세는 독수리 같고, 매 같았다. 조치훈 9단은 바둑판 앞에 바짝 다가앉아 물끄러미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씬 처연한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조훈현 9단이 백.
바둑은 조훈현 9단의 시간승으로 끝났다. 제한시간 각자 1시간에 40초 초읽기 3회. 조훈현 9단은 비교적 속기이고, 조치훈 9단이 초반부터 장고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보나마나 조치훈 9단이 먼저 초읽기에 몰릴 것이라고 예상들을 했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조훈현 9단이 오히려 초반에 공을 들였다. 그랬는데도 형세는 백이 좀 비관적이었는데, 국후 조치훈 9단의 말마따나 “멋있게 두려다가” 전세가 바뀌었다. 그러다 조훈현 9단이 “깜빡 흑의 반격 수단을 간과하는 바람에” 형세는 다시 뒤집어졌고, 거기서부터는 난전이었다. 조훈현 9단이 먼저 초읽기를 시작했고, 뒤따라 조치훈 9단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내 두 사람이 모두 마지막 초읽기에 쫓기게 되었다. 조치훈 9단이 둘 차례였다. 계시원이 “여덟!”을 불렀는데도 조치훈 9단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홉!”에 조치훈 9단의 손이 바둑판 위로 날아갔다. 조치훈 9단의 흑돌이 바둑판에 떨어질 때 “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동시였다.
그런데 일단 ‘열’ 소리가 나면 시간패라는 것, 그게 공식 대국의 룰이다. 조치훈 9단은 착점한 순간의 그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였고, 계시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으며 조훈현 9단은 잠깐 계시원 쪽을 쳐다보고는 착점을 못하고 있었다. 심판 김인 9단이 다가왔다. 계시원과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조치훈 9단에게 뭔가를 설명하자 조치훈 9단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복기에 들어갔다. 시간패를 인정한 것이었다. 잠시 후 이세돌 9단이 복기에 합류했다.
두 사람이 2층 공개해설장으로 올라갔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조훈현 9단에게 8연패를 당했는데?” “왜 머리와 수염을 기르는지” “한국리그에 참가할 생각할 없는지?” “50여 년 바둑 승부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바둑은?” “예전에는 바둑에 지면 괴로워하고, 금방 어디로 사라져 볼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졌는데도 웃고 있다?” “요즘도 바둑공부를 하느냐?” “한국 기사 중에서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다면?” 등등 질문은 주로 조치훈 9단에게 향했다. 조치훈 9단은 시종 유머와 위트로 대답하며 좌중에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중년 여성 바둑 팬 한 사람은 “조치훈 사범님, 너무 귀여우시다”면서 손뼉을 치며 발을 굴렀다.
조치훈 9단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조훈현 선배가 나보다 세니까” “대국하면서 머리를 자주 만지고 탁탁 치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집에 빗이 없다^^” “조훈현 선배가 안 계시다면 생각해 보겠는데… 조훈현 선배가 ‘소질’은 나보다 100배 나은데, 대신 나는 조훈현 선배보다 100배 노력을 했다” “방금 들은 ‘열’ 소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 내가 ‘열’ 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가물가물하기도 하고^^” “사람이 훌륭해졌다. 훌륭한 조치훈^^” “예전보다 더 열심히 한다. 바둑을 두어 돈을 받는데, 부끄러운 바둑을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데 요즘은 기보를 놓아보다가 바둑돌을 통에 담고 뚜껑을 덮은 순간 다 잊어버린다^^” “김지석 9단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강한 것 같지 않았는데, 몇 년 사이에 엄청 늘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늘 수 있는지… 김지석 9단의 바둑?… 뜨거운 바둑이다”
아직도 바둑팬들 사이에서 이따금 설왕설래 화제가 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조치훈 9단이 한국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조치훈 9단이 일본에 귀화했느냐, 안 했느냐? 조치훈 9단은 한국말을 잘한다. 일본에서 한국계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까. 다만 평소 많이 쓸 기회가 없어 단어가 얼른 생각나지 않아 더듬는 경우가 있는 것뿐이다. 첫 마디를 우물쭈물하면 기자나 아나운서는 조치훈 9단이 한국말을 잘 못하는 줄 알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다시 또 첫 마디를 우물쭈물하게 된다. 그래서 아, 조치훈 9단이 한국말은 서툴구나 하는 오해가 생긴 것. 이번 인터뷰 때도 조치훈 9단은 ‘소질’ ‘훌륭한 조치훈’ ‘뜨거운 바둑’ 같은, 우리 귀에 익지 않은 신선한 단어들을 구사했다. 또 하나 조치훈 9단은 부인은 일본인이지만, 일본에 귀화한 적이 없다.
조훈현-조치훈 대국은 감동적이었다. 아니, 두 사람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특히 나이 지긋한 바둑팬들은 감동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과 대국에 감동을 안고 돌아간 바둑팬들 중에는 “한두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꼭 그렇게 시간패로 해야 했느냐는 것. 대국 장소와 공개해설장을 꼭 여기로 해야 했느냐는 것. 다만 시간패에 대해서는 “룰은 룰이다. 타이틀이 걸린 바둑이든 친선대국이든 프로든 룰에 엄격해야 한다”는 원칙론 앞에 크게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웠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대국장소에 대해서는 반론이 우세했다. 준비하는 측에서는 애초 서울역광장이나 시청광장 같은 곳도 후보로 생각했고, 판문점에서 하자는 얘기도 나왔다고 하는데, 안전 관리 문제나 비라도 오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고, 생방송에다가 팬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려면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 바둑TV 스튜디오와 한국기원 2층 대회장이 안전한 곳으로 결정되었다는 것. 그러나 가령 한국리그 연말 시상식 등은 코엑스 같은 곳에서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