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여름철이면 생각나는 시원한 물회 한 그릇. 물회는 고기 잡느라 바쁜 어부들이 배 위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탄생한 음식이다. 갓 잡은 생선을 뭉텅뭉텅 썰어 고추장을 넣고 비빈 다음, 물을 붓고 한 그릇 시원하게 들이켰다. 거기에 밥이나 국수를 말아먹고 나면 허기를 달래는데 그만이었다. 어부들의 한 끼 식사로, 해장으로 그만이었던 물회는 맛의 진화를 거듭하며 이제 여름철 별미로 자리 잡았다.
먹을 것 넘쳐나는 지금은 찾는 이 없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음식들, 그 안에서 옛 추억을 더듬어 보는 KBS1 TV ‘한국인의 밥상’이 오는 13일(목) 오후 7시 30분에 포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포항물회’를 최불암 씨의 구수한 설명으로 전국에 소개한다.
■ 물회, 뱃사람들의 애환을 담다.
물회 하면 떠오르는 경북 포항. 지유수 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포항 구룡포에서 어부로 살고 있다. 지유수 씨가 주로 잡는 어종은 포항물회의 주재료인 참가자미. 매일 새벽 5시면 아내와 함께 바다로 나가 그물을 걷어온다. 시장기가 돌 때면 배 위에서 잡아 올린 참가자미 몇 마리 썰어 물회 한 그릇 뚝딱 말아먹는다.
물회는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배에서 먹던 어부들의 음식이었다. 한 끼를 대신해 먹기도 했고, 안주 삼아 술과 함께 마시기도 했으며, 술 마신 다음 날 후루룩 마시며 속을 달래기도 했다. 물회 한 그릇에는 뱃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오징어로 시작한 인생 2막, 배기환·김말순 부부
젊은 시절, 10년 넘게 해외로 나가는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던 배기환 씨. 일 년 중 10개월은 배 위에서 생활하느라 삼 남매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 포항에 터를 잡고 오징어조업을 하며 생활하고 있지만, 지난날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여전히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다.
싱싱한 오징어로 만든 새콤한 오징어물회와 오징어회국수를 자주 맛보는 것은 오징어뱃일을 하는 아빠를 둔 가족의 특권. 아내 말순 씨는 대대로 포항에서 먹어왔다는 오징어내장젓갈과 오징어 밥식혜까지 차려낸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서로에게 더욱 애틋해졌다는 배기환 씨 가족의 밥상을 만나본다.
■ 파도를 이겨낸 어머니의 힘, 오도 해녀 삼총사
흥해읍 오도리에 가면 물질할 때마다 늘 뭉쳐 다닌다는 해녀 삼총사가 있다. 세 해녀 모두 70대, 물질 경력이 약 50년이다. 그중 75세의 맏언니 김춘례 씨는 40년 전 바다에서 뱃일을 하던 남편을 잃었다. 한창나이의 남편을 앗아간 바다에 원망도 많았지만, 살아내기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가야 했고, 결국 바다에서 물질해 번 돈은 가족들의 밥이 되고 자식들의 학비가 돼주었다.
바다가 삶의 전장이었지만 다시 살아갈 희망을 주었던 곳 또한 바다였다. 귀한 해산물로 차려낸 성게전복물회와 생전 남편이 좋아했다는 전복죽, 그리고 바닷가 마을에서 주로 담가 먹었다는 해초된장장아찌까지, 음식에 담긴 해녀들의 인생 얘기를 들어본다.
■ 옛 선조들의 지혜가 담기다, 해안가 보릿고개 음식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인 포항. 이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이 먹던 추억의 음식들이 있다. 지금은 있어도 안 먹는다는 도박이라는 해초에 밀가루를 뿌리고 쪄낸 도박떡은 먹을 것 없던 때 주린 배를 채우려 먹던 음식이었고, 생선살에 된장과 콩나물을 넣어 푹 끓여낸 콩나물국 죽은 여름철 보양식이었다.
특히 이곳에는 독특한 물회가 전해오는데, 바로 말린 미역과 마른멸치로 만든 미역멸치물회. 회 써는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했던 어민들이 만들어낸 음식이자, 마른 재료로 만들어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게 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음식이다.
이동주 기자 ilyo8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