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5단은 1958년생. 중·고교 시절에 바둑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대학에 가고 싶어 공부하느라 입단은 1983년, 스물다섯의 늦은 나이였다. 입단 후 활약은 보통 이상이었다. 본선에서 놀았고, 조훈현 9단과 타이틀 매치도 한 번 벌였다. 그러나 승부로는 큰 비전이 없겠다 싶었던지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
문 5단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문 박사’라고 부른다. 문 5단은 서강대 영문과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은퇴 후 문 박사는 잠시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바둑 평론가’로 돌아왔다. 바둑 관계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독자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다. 글이 좀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문 박사의 글이라면 무조건 찾아 읽는 마니아층이 생겼다.
문 박사가 이번 추석 연휴에 선보인 글은 ‘바둑의 두터움’에 대한 것이었다. ‘두터움’은 가장 ‘바둑스러운’ 바둑 용어 가운데 하나다. “두텁다는 것은 정이 두텁다, 두터운 신뢰… 그럴 때 쓰는 말이지 바둑에서 뭐가 두텁다는 거냐. 두껍다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옛날 얘기다.
문 박사는 두터움을 설명하면서 우리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9단과, 일본의 기타니 미노루, 다카가와 가쿠, 사카다 에이오, 후지사와 슈코, 린하이펑(임해봉), 다케미야 마사키, 요다 노리모토 9단 등 10명을 호명해 그들을 다시 유창혁-후지사와, 기타니-다카가와, 린하이펑-다케미야, 이창호-요다, 조훈현-사카다로 둘씩 짝 지운 후, 그들의 실전보를 통해 ‘두터운 수’의 여러 종류를 예시하고, ‘두터운 수’를 둘 때의 바둑판 상황에서 시작해 앞뒤의 변화, 대국자의 심리까지를 분석·논구해 들어간다.
열 사람 가운데 조훈현 9단, 기타니 9단, 사카다 9단은 좀 그렇지만. 나머지 일곱 사람은 두터움으로 정상을 정복한 대가들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일곱 사람을 두터움으로 묶을 수 있겠으나 조금 더 들어가면 일곱 사람의 두터움이 각각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유창혁 9단과 다케미야 9단은 공격적 두터움이고 이창호 다카가와 후지사와 요다 9단은 수비적 두터움이라는 것. 나아가 유창혁과 다케미야의 두터움이 또 좀 다르고, 다른 네 사람의 두터움도 또 좀 다르다는 것. 조훈현 9단과 사카다 9단을 두터움 강연장에 등장시킨 것도 재미있다. 두 사람은 발이 빠르고 실리에 민감한 기풍이지만, ‘발 빠른 실리’가 함축하는 두터움이란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읽기가 쉽지는 않다. 바둑학과 고학년이나 대학원생을 위한 바둑이론 혹은 ‘기사론(棋士論)’의 교재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둑 행마의 이론서나 기사론이나 그런 것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종류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문 박사의 이번 기고를 읽은 문용직 마니아들은 “바둑 이론의 전개에서나 기사론에서, 물론 찬반은 있겠으나, 확실히 기존의 것들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격단의 수준”이라고 말한다. 격단의 수준까지는 모르겠지만, 독보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둑팬들을 즐겁게 해준 또 한 사람은 조미경 초단이다. 얼마 전에 이름을 조연우로 바꾸었다. 1989년생으로 2005년에 입단했다. 아주 씩씩한 성격이어서 그 기세라면 금방 성적을 낼 것 같았다. 승부의 제1 조건은 배짱이 두둑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조연우는 그저 그런 정도였고, 얼마 안 있어 외국으로 떠났다는 얘기가 들렸다. 문 박사처럼 승부로는 장래가 불투명하다고 보고 보급, 특히 해외보급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싱가포르로 날아가더니 거기서 다시 영국, 영국을 거쳐 아이슬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대학교 바둑클럽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고 지도기를 두어주면서 글로벌 인맥을 구축했다. 씩씩한 성격을 승부가 아니라 대인관계에서 발휘했던 것.
요즘은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TV에서 매일 밤 10시부터 세 시간 동안 BJ(Broadcast Jockey)로 활동하고 있다. 비속어도 마다 않는 거침없는 말투로 다면기 복기 내기바둑 등을 신나게 진행한다. 5월 말 시작했는데, 등록회원이 벌써 6400여 명, 동시접속자만 해도 많은 날은 500명이 넘는다. 폭발적인 반응이다.
“젊은 사람들이 바둑을 안 둔다고들 하잖아요. 바둑 자체가 어려운데다가 가르치는 것도 딱딱하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재미가 없거든요. 젊은 층에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바둑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바둑도 예능처럼 해보자, 이거였죠. 가령 바둑이 진행될 때 상황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틀어주는 거예요. 수상전이 벌어지든가 하면 흥미진진하게 긴박한 음악을 효과음으로 깔아줍니다.”
조연우의 방송은 예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둑만 하는 게 아니다. 일주일에 2~3일은 바둑 외에 요즘 트렌드인 ‘먹방’도 하고 때로는 춤도 춘다. 이를테면 ‘바둑테인먼트(Baduk-tainment)’다. 조연우는 또 낮에는 대학에도 출강하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바둑의 품격을 따지는 사람들에게 내 방송을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젊은 층에게는 품격보다 재미가 우선인 것 같아요.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방송으로 끌어갈 거예요.”
프로기사에게 타이틀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문용직과 조연우는 품격과 재미의 양날개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