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K리그, 그리고 아시안게임까지 잠시도 쉴 틈 없이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는지 이운재는 “정말 힘들었다”며 잠시 회한에 잠기는 듯했다. 아시안게임의 와일드카드로 출전, 이란과의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패를 당하며 금메달이 동메달로 바뀐 데 대한 솔직한 생각이 궁금해졌다.
“축구는 멋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력으로 하는 거라고 얘기했다. 귀고리, 목걸이 등 외모에 잔뜩 멋을 내면 뭐하나. 축구를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데. 겉멋 든 친구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이운재는 술을 퍽 잘했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딱딱해 보이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웃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운동장에선 경기에 집중하다보니 웃을 일이 거의 없다”고 응수한다. 술자리에서 이운재만의 철칙이 있다면 절대로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고 쉬엄쉬엄 마시는 법이 없다. 한번 들면 ‘원샷’이 대부분이었다.
함께한 지인 중 사진작가로 최고의 주가를 떨치는 조선희 작가도 참석했는데 지난번 김남일 김태영 이영표와 함께 컴필레이션 재킷 사진을 촬영하며 친분을 맺은 뒤 가끔씩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라고 소개했다.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이었지만 누나, 동생하며 썩 잘 어울렸다. 조선희 작가 앞에서 이운재는 애교가 듬뿍 담긴 말과 행동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이운재의 참모습은 술자리에서만 나타나는 모양이다.
술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 한 토막. 경희대 축구부 시절 이운재의 술 실력은 학교 앞 주점 주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 정도의 말술이었다. 토요일 외박을 나와 1박2일간 16차까지 간 적도 있고 한 축구부 동기와 청하를 쌓아 놓고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57병을 해치웠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도 들린다. 그후 축구부 동기는 3일간 몸져누웠고 이운재는 이틀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상고 출신이라 그런지 아무리 술에 취해도 셈이 정확해 가끔 웃지못할 해프닝도 일어난다. 주인이 술값을 계산하기 전에 미리 암산으로 합계를 이야기하는 일이 다반사고, 웨이터가 술 취한 손님이라고 만만하게 보고 시키지도 않은 메뉴를 포함해서 엉뚱한 계산서를 끊어올 경우엔 그 자리에서 얻어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만취된 상태에서도 계산만큼은 아주 정확하다는 증거다.
▲ 지난 9월7일 남북통일축구대회에 참가한 이운재 | ||
“난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나와 뜻이 맞는 몇몇 친구, 선후배들과 깊고 좁게 만난다. 그러다보니 정을 많이 주게 된다. 성격이 대중적이지 않아 쉽게 사람을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너무 소중하다.”이운재는 사적인 모임엔 거의 부부동반을 즐긴다. 자주 떨어져 있다보니 아내 김현주씨와 외출을 선호하는 편인데 기자가 찾아간 자리에도 김씨가 동석해 있었다. 그러고보니 거의 부부들끼리 모인 술자리였다. 한 가지 재미난 풍경이 있다면 아내는 아내들끼리, 남편은 남편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신다는 점. 이유는 술 종류 때문이었다.
이운재는 좀 무뚝뚝한 편이다. 신혼 초에는 이런 무뚝뚝함 때문에 자주 다투기도 했지만 요즘엔 주위 사람들로부터 ‘닭살 커플’이라고 지적 받을 만큼 튼실한 부부애를 과시한다. 그 배경엔 월드컵 이후 여러 가지로 안정된 생활을 이뤘기 때문.“월드컵 후 내 인생이 달라졌다. 축구를 보는 시각도, 세상을 느끼는 맛도 아주 다르다. 물론 경제적인 부를 쌓은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게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따져보면 아마도 오랜 라이벌로 비쳤던 김병지와의 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간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월드컵을 준비하며 남모를 고통과 인내를 통해 주전 자리를 확보한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선배인 김병지에 대해선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 물론 선후배의 정을 나눌 정도의 친분은 없지만 그렇다고 앙금이 있는 건 아니다.
“원래 공격수였다면서요?”라는 말로 화제를 바꿨다. 포지션 변경의 이유를 물었더니 두 가지 중 한 가지라고 말하는데 첫째는 체중을 빼지 못해서, 둘째가 90분간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다. 정답은 독자의 상상에 맡겨달라고 한다.올시즌이 끝나면 이운재는 FA(자유계약선수)가 된다. 내년 FA시장의 최대어로 꼽히는 터라 벌써부터 거취 문제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욕심 같아서는 해외 진출을 통해 한국 골키퍼 최초의 외국 진출을 이루고 싶다. 불가능할 경우엔 자신의 몸값을 최대한 끌어 올려 최고의 대우를 받고 싶지만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어 말 꺼내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라고 한다.
돈을 벌려고 축구했다는 이운재, 그래서 축구를 더 잘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이운재와 ‘원샷’을 외치며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녹음도, 필기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운재가 하지 못하게 했다) 술 마시며 나눈 이야기들을 다 잊어버릴까봐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아 참, 이운재는 기자와 헤어지며 이런 멘트를 날렸다. “내일이 ‘간의 날’인데 내가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그런데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으니…. 아마도 내 간이 비웃을 것 같다.”
참고로 이운재는 만성 간염에 시달리다 2년여 간의 노력 끝에 완치한 경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