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이상훈 | ||
먼저 이상훈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소감이 어떠냐.
▲좋다.
─5차전은 어떤 각오로 임할 것인가.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또 있겠나?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로 마치 기자들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상훈의 답변은 매몰차고 아슬아슬했다. 그러자 또다른 기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계속되는 등판으로 체력이 저하됐을 텐데 문제가 없나.
이상훈은 그 기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
▲그런 질문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적절치 못한 질문이다. 진정 원하는 대답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앞으로 그런 질문은 삼갔으면 좋겠다.
순간 인터뷰실 안은 썰렁한 기운만 감돌았다. 어느 누구도 쉽게 다음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이상훈의 분위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강성이다. 타협과 양보도 없고 오로지 ‘마이웨이’만을 외치며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4년 반 만에 돌아와 새롭게 맛본 한국시리즈 진출은 이전의 무뚝뚝한 표정을 한결 가볍게 풀어준 최고의 선물인 듯했다.
포커페이스의 이상훈도 포스트시즌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힘들게 타자를 아웃시킬 때, 그리고 9회에서 세이브를 딴 후 승리를 지켰을 때는 보는 사람마저 기분좋게 만들 정도로 마운드 주위를 껑충껑충 뛰며 포수 조인성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그러나 그뿐이다. 덕아웃으로 돌아와선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한 표정이 되고 만다.
한국시리즈 진출이 결정된 광주구장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멋진 세리머니로 나타낸 뒤 마운드를 내려온 이상훈은 큰 감동을 전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없다는 설명이었다. 팀 전체가 목표 의식을 갖고 똘똘 뭉쳤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간단한 소감이 이어졌다. 포스트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문가들 모두가 LG를 ‘희생양’으로 삼는 듯한 예상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상을 깬 데 대해 이상훈은 의미있는 말을 남긴다.
▲ 지난달 30일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은 뒤 포 효하는 이상훈. | ||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같은 단기전은 정규시즌 때와는 또 다른 마음가짐을 요구한다. 포스트시즌 들어 공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궁금했다.
“볼 배합도, 공 끝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신 상태가 중요해요. 얼마만큼 차분한 마음으로 한 타자 한 타자를 처리하느냐가 관건이죠. 어떤 경우엔 한 이닝 동안 인생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다양한 일들이 벌어져요. 그런 희로애락에서 내 자신을 컨트롤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한 일입니다.”
무심과 무아의 경지를 넘나드는 듯한 이상훈도 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기 때문에 타자를 상대할 때마다 습성이나 기록 등을 꼼꼼히 상기하며 요리할 ‘꼼수’를 떠올린다. 배짱과 오기만큼은 당할 자가 없어 보이는 이상훈도 위기 상황에 닥칠 때는 가슴 졸이기도 하고 공 하나에 달라질 승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실투가 불러올 결과에 진한 미련을 가질 때도 있다.
이상훈은 4년 반 만에 돌아와 보니 인사하는 입장에서 인사 받는 위치로 변해버렸다고 말한다. 중간 과정이 생략된 채 갑자기 고참이 되고 보니 이전의 개인적인 언행은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었다고. “내 행동에 따라 선수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좀 적응이 안되더라구요. 후배들에게 잘해줘야 하겠는데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었어요.”
김성근 감독은 LG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한국시리즈까지 오른 데에는 이상훈의 힘이 컸다며 그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했다. 이상훈의 참모습은 기자들이 사라진 경기중의 덕아웃에서 나타난다. 실수하고 돌아온 후배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용기를 북돋우고 승점이라도 올릴경우에는 맨 먼저 뛰쳐나가 동료를 껴안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람이 이상훈이다. 마무리로 교체돼 마운드로 올라갈 때는 마치 1백m 경주라도 하듯 힘차게 달려나가는 모습이 가슴 찡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동료들에게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마운드에 임하는 투지와 각오를 읽는 것 같아 관중은 물론 기자들까지 흐뭇하게 만든다.
때론 건방지고 오만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도 종종 있지만 진정 이상훈의 생활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한없이 정도 눈물도 많고 마음 약한 남자라는 데 이견이 없다. 사생활을 철저히 감추고 마운드에서만큼은 최고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 이상훈이 있기에 LG는 힘이 넘쳐난다. 사랑이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