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김병현(23) | ||
애리조나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직후인 지난 10월초 애리조나 지역신문인 <애리조나리퍼블릭>에서 맨 처음 ‘김병현을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만 해도 그저 한번 스쳐 가는 ‘설’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이후 지역 언론의 공세가 점점 가열됐고, 마침내 조 가라지올라 주니어 애리조나 단장이 최근 “김병현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은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으면서 이제 트레이드는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 됐다.
현재 애리조나 구단은 김병현과 멕시코 출신 1루수 에루비엘 두라조를 ‘패키지 카드’로 묶어 각 구단들과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은 딱 떨어지는 카드를 찾지 못했지만 공개리에 트레이드 대상으로 지목한 이상 구단은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 일단 버림을 받았던 선수가 만일 내년에도 잔류한다면 팀 분위기상으로도 득이 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트레이드 불가 선수(언터처블)로 취급되던 김병현이 왜 졸지에 내몰리게 됐을까. 이유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한다. 우선 긍정적인 쪽을 보면 다소 역설적인 얘기지만 그만큼 젊고 실력이 있어서다.
메이저리그는 냉혹하다. 자기 팀의 구성상 필요 외 전력이라는 판단이 서면 과감히 다른 팀의 문을 두드려 진정 필요한 카드와 맞바꾼다. 자신이 딱 원하는 카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이쪽에서 ‘상품가치’가 높은 선수를 내놔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애리조나는 내년에 팔꿈치 부상에서 돌아오는 마무리투수 매트 맨타이가 있다. 맨타이는 내년 연봉이 6백만달러나 되고, 부상 전력도 있어 타 구단이 데려가길 꺼린다. 역할이 중복돼 한 명을 내놔야 한다면 구단은 김병현을 택할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이유를 대자면 한마디로 ‘찍혔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애리조나 지역 언론은 김병현이 지난해 월드시리즈에서 치명적인 홈런 3방을 맞고, 올해 올스타전과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한 것을 예로 들며 ‘큰 경기에 약하고 기복이 심하다’고 몰아세웠다. 평소 조용한 성격 탓에 미국 기자나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한 김병현은 ‘마녀사냥’의 첫 번째 타깃이 됐다.
이밖에 어려워진 애리조나 구단의 자금 사정도 한몫했다. 애리조나는 내년도 총연봉을 3천만달러 이상 감축하려 한다. 이런 판에 올해 처음 연봉 조정신청 자격을 얻어 내년 연봉이 10배 이상 상승할 것으로 보이는 김병현은 부담스런 존재다.
일단 트레이드는 기정사실이 됐고, 이제 궁금한 것은 과연 어느 팀에서 새 보금자리를 틀 것인가다. 애리조나를 제외한 29개팀이 모두 대상이겠지만 그래도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좇아 찬찬히 생각해보면 짚이는 구단은 몇 군데로 압축된다.
애리조나는 김병현을 팔아서 선발투수나 오른손 강타자를 영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상대는 자연히 마무리가 공석이고, 선발투수나 오른손 강타자가 남아도는 팀을 꼽을 수 있겠다.
이렇게 선을 그어보면 몬트리올 엑스포스(내셔널리그)나 텍사스 레인저스, 보스턴 레드삭스, 오클랜드 어슬래틱스(이상 아메리칸리그) 등이 물망에 오른다.
이 가운데 오클랜드는 지난 4일(한국시간) 마무리 빌리 코치를 시카고 화이트삭스 마무리 키이스 풀크와 맞바꿔 일단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김병현과 묶인 두라조를 워낙 오래 전부터 탐내던 팀이라 아직 후보에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몬트리올과 보스턴은 1루수와 마무리를 동시에 찾고 있어 김병현과 두라조 카드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팀들이다.
텍사스는 시즌 중반 마무리로 전환했던 일본인 투수 이라부 히데키가 폐 혈액순환 장애로 물러난 뒤 방출됐고, ‘말썽꾼’ 존 로커 역시 적응에 실패해 팀을 떠났다. 거기다 지난 2000년까지 애리조나 사령탑을 맡으며 김병현을 상당히 아꼈던 벅 쇼월터 신임 감독이 ‘러브콜’을 보낼 확률이 높다.
▲ 박찬호(왼쪽), 김선우(오른쪽) | ||
김병현으로서는 트레이드를 ‘제2의 탄생’을 위한 계기로 삼을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경우 대부분 트레이드라면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인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는 자신을 더욱 필요로 하는 팀으로 옮긴다는 긍정적인 사고로 트레이드를 받아들이는 선수들도 많다.
김병현은 지난 99년 미국 진출 첫해부터 선발투수 전업을 노래부르다시피 했다. 그러나 애리조나에 있게 되면 도저히 선발에 낄 자리가 없다. 마무리는 마무리대로 매트 맨타이에게 밀리게 돼 중간계투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럴 바에야 팀을 옮겨 오랜 꿈을 펼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김병현을 노크하는 상대팀들은 대부분 그를 선발이 아닌 마무리 용도로 고려하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선발보다는 올해 데뷔 후 36세이브라는 최고의 성적을 거둔 마무리로서의 김병현을 더 믿는 것이다.
그러나 새 팀의 선발 투수진이 그리 탄탄하지 않을 경우 변수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어딜 가든 메이저리그 전체 1, 2위 선발투수인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이 버티는 애리조나보다 선발 진입의 문턱이 높은 팀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 메이저리그에는 김병현처럼 연봉조정신청자격을 얻은 선수들이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메이저리그 풀타임 3시즌을 채우면 그 선수는 연봉조정신청 자격을 얻게 돼 사실상 재계약의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 김병현 역시 그 케이스다.
4일 오클랜드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한 마무리 빌리 코치나, 디트로이트에서 피츠버그로 트레이드된 랜달 사이먼도 연봉조정신청 자격 선수로 몸값 대폭 상승을 두려워한 구단이 서둘러 트레이드시킨 것이다.
애리조나는 김병현, 두라조 외에 주전포수 대미안 밀러마저 연봉조정신청 자격을 갖추자 마이너리거 2명을 받고 최근 시카고 커브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김병현은 올해 데뷔 후 4년 만에 최고의 성적을 냈고, 때마침 연봉조정신청 자격의 날개까지 달아 ‘대박’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트레이드 도마 위에서 노심초사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다.
때를 잘못 만나 정든 팀 애리조나에서 뜻을 펼칠 수는 없게 됐지만 트레이드가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처한 상황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내년 시즌 뚜껑이 열리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박진형 스포츠조선 미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