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가슴이 시커멓게 탔을 이동국은 “이것저것 다 놓 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며 상무 입대를 앞둔 심경을 털어놨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사이백신’이란 기계를 이용해 근력운동을 한 후엔 속이 울렁거린다며 그는 연신 찬물을 찾았다. 식사와 간단한 술자리를 갖기 위해 고기집을 찾았는데 한동안 숟가락을 들지 못할 만큼 힘들어했다.
2월경 군입대를 앞두고 대구 영남대학교에서 재활훈련중인 이동국(25)은 만나기도 힘들었고, 인터뷰하기까지에도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대구까지 원정(?)가서 술상을 차렸지만 좀체 편한 분위기가 이뤄지지 않았다. 질문 내용들이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잔인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동국은 싫은 내색없이 솔직 담백한 태도로 ‘취중토크’에 응했다. 이동국이 재활 훈련중이라는 점을 감안해 그는 음료수를, 기자는 맥주를 마시는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왼쪽 무릎의 근력이 약해졌다’는 진단 결과를 받고 친구의 소개로 영남대 스포츠과학연구소를 찾았다는 이동국. 친구의 자취방을 숙소로, 연고 없는 대학의 체력 단련장을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삼고 학교 주변의 산을 오르내리며 극기 훈련을 대신한다는 말 속에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이동국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포항을 나오기 전 신년회 자리에서 팬들이 군대 가는 날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줬어요. 그들이 보여준 사랑에 제대로 보답도 못했는데 너무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찡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죠. 회한이 많았었나봐요.” 된장찌개를 반찬 삼아 식사를 하던 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춰버린다. 다시 생각해봐도 가슴 벅찬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화제를 98년 프랑스월드컵으로 돌렸다. 대표팀에서의 이동국은 하늘을 찌를 듯한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그라운드에 ‘오빠부대’가 출현했던 시기도 이동국의 프로 데뷔와 맞물려 있다. 프랑스월드컵 얘기를 꺼내자 이동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금도 이동국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한다. 식당도 외곽의 한적한 곳을 찾아다닐 만큼 낯을 가린다. 사람이 알아보는 데 따른 불편함도 있지만 대중이 몰려 있는 곳에서는 자칫 구설수에 휘말릴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상한 오해를 참 많이 받았어요. 특히 술에 관해서는. 한 번은 포항 숙소에 있는데 다음날 어느 신문에 내가 서울 강남 부근의 포장마차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는 기사가 실린 거예요. 진짜 황당했죠. 어떻게 포항에 있는 사람이 새벽까지 서울에서 술을 마실 수 있냐는 거죠. 고소할 생각까지 했었다니까요.”
외출할 때는 의식적으로 모자를 쓰거나 옷으로 최대한 얼굴이 가려지도록 변장(?)을 한다고 한다. 근거 없는 구설수 확대 방지 차원에서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회의가 든다고. 연예인도 아닌데 왜 이런 차림을 하고 다녀야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미스코리아 출신 L양과의 열애설, 결혼설에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제발 그런 기사 쓰려면 최소한 당사자한테 확인이라도 하고 썼으면 좋겠어요. 어설프게 들은 얘기를 소설화시키면 신문이야 잘 팔리겠지만 나와 그 친구가 겪는 고통이 어떠하리라고 상상이나 해봤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남자니까 괜찮지만 그 친구는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하는데 얼마나 큰 타격을 입겠어요. 이젠 전화 통화하기조차 겁나요. 그런 일만 없었으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였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화가 나요.”
어려운 질문을 꺼냈다. 2002월드컵과 관련된 얘기였다. 98프랑스월드컵이 이동국한테 ‘행운의 여신’으로 작용했다면 2002월드컵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악몽으로 남아 있다. 스트라이커 부재 속에서 이동국의 역할은 많은 기대를 낳았지만 ‘히딩크호’에서는 이상하게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최종 엔트리를 발표하기 전에 이미 탈락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훈련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하지만 팬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대충대충 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의욕이 있을 리가 없죠.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결국 탈락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내가 왜 이것밖에 안되는지 정말 답답하더라고요.”
▲ 왼쪽 무릎의 근력이 약해진 이동국은 요즘 대구 영남대학 교에서 재활훈련중이다. | ||
축구선수, 구단, 기자, 모두 멀리했고 아예 휴대폰을 꺼놓은 채 어린시절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월드컵이 하루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지만 예상치 않았던 4강 신화 달성으로 인해 월드컵 후유증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이동국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부산아시안게임을 통해 군 면제 혜택과 월드컵을 통해 받은 상처를 회복하려던 ‘욕심’은 동메달에 그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대에 가야 할 운명이란 걸 깨달았죠. 이런저런 기회를 다 놓치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상무에 자원했어요. 군대 문제가 해결돼야 다른 일이 풀릴 것 같았어요. 하나 둘씩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있는 중인데 이런 기회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봐요. 한 가지만 보고 달려온 인생을 정리할 수 있게 됐잖아요.”
밥맛이 없다며 숟가락을 놓고 있다가 인터뷰 말미에 그의 식욕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식성하나는 끝내준다”며 공기밥을 단숨에 비우고 손대지 않던 고기도 먹었다. 중간중간 술을 따라주면서 대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연상 게임을 했다. 이름을 대면 즉시 생각나는 단어나 설명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최순호 감독? 패션모델’, ‘고종수? 웃긴다’, ‘황선홍? 부상과 재활’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지다 ‘히딩크 감독?’ 하는데 갑자기 말이 끊어진다.
상무 유니폼을 입고 올 K리그에서 달라진 모습을 선보이겠다는 이동국. 앞으론 그가 주변에 드리워진 칙칙한 기운을 걷고 쨍한 햇빛 한가운데로 당당히 걸어나왔으면 좋겠다. 그때쯤이면 소줏잔 기울이며 하는 어떤 질문에도 가슴 아파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