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졸 최대어로서 지난 2001년 말 협회의 드래프트 규약을 어기고 자유계약으로 LG화재에 입단, 배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경수(24). 그후 협회의 강경대응으로 선수등록이 거부된 이경수는 2년 동안 ‘무적 선수’로 코트 밖을 떠돌아야 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LG화재 선수로 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
이경수는 부모가 모두 1급 시각장애인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의지의 스타로 알려져 있다. 선천적으로 약골인 이경수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한국 최고의 공격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극진한 정성과 그의 남다른 강인함이 자리하고 있다.
배구스타 이경수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선수다. 배구선수 출신인 어머니 김둘연씨(50)는 고교시절 훈련 중 배구공에 눈을 맞아 실명했고, 아버지 이재원씨(58) 역시 어린 시절 폭발사고로 양쪽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평소 이경수의 밝은 표정을 본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전맹’(全盲)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지난해 10월 부산아시안게임 일본과의 준결승에 출전해 블로킹하고 있는 이경수. 그의 코트 복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대한매일] | ||
이렇게 해서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전 유성초등학교에서 배구를 시작한 이경수는 당시 지도교사의 도움으로 일찌감치 한국 배구의 유망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이경수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사가 바로 이홍규 전 교장(70ㆍ전 충남배구협회 부회장)이다. 이 전 교장은 무려 4년 동안 학교 체육관에서 손수 밥까지 해주며 그를 친자식처럼 돌봤다.
서남원 등 대형스타들을 길러내기도 한 이 전 교장은 “큰 키와는 대조적으로 워낙 약골이어서 조금만 뛰어도 무릎과 허리가 아파 쓰러지거나 구역질을 하기 일쑤였다”고 이경수의 당시 모습을 회상하면서 “워낙 말수가 적고 착한 애여서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에도 이경수의 건강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철결핍성 빈혈로 코트에 쓰러지는 일이 잦았을 정도. 그만큼 이경수는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운동을 해왔고, 그렇기에 그의 눈부신 성장은 배구인들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경수가 대학가의 초특급 선수로 성장한 뒤안길에는 수많은 나날 안타까움으로 가슴을 태운 부모가 자리하고 있다. “장애인인 부모가 나타나면 경수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중학교 졸업 전까지도 경기장에 가지 않았다”는 아버지 이씨는 아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한이라고 한다. 그런 이씨에게 아들이 코트에 설 수 없는 현실은 또 하나의 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운동을 해왔는데 주변에서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선수 앞길을 막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이씨는 ‘돈 때문에 드래프트를 거부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때 가장 서글프다고 말한다. ‘단지 돈 때문이었다면 LG화재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이경수의 부모가 특히 서운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아들이 한양대에 진학한 뒤 드래프트제를 도입하고 졸업한 후 다시 자유계약제로 선회한 협회의 불분명한 태도. ‘2년 동안만 시범적으로 드래프트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한 협회가 나중에 발뺌했다는 것이다.
소속팀의 선배인 이수동(26)도 “나 자신이나 선수들 모두 ‘경수 때문에 경기에 못나간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며 “드래프트제와 자유계약제가 수시로 바뀌는 등 확실한 룰이 없다”고 협회의 일관되지 못한 정책을 꼬집었다.
지난해 시각장애인들이 탄원서를 내는 등 주위에서 아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것에 대해서 고마움을 나타내던 이씨는 “팬들이 복귀를 원하고 있지 않느냐”며 아들의 문제가 순리대로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한재성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