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이 떠들썩할 정도의 ‘사건’으로 비화됐던 베컴의 눈 언저리 부상 소동으로 라커룸에 대한 관심이 높다. 지난해 방한 때의 베컴. | ||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국내 스포츠계에서는 친분이 두터운 다른 팀 선수들에게조차 라커룸에서 일어나는 일은 발설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외부의 시선이 단절된 라커룸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선수대기실의 또 다른 이름인 ‘라커룸’은 ‘접근금지 구역’이다. 팬들에게는 물론, 언론에조차 좀처럼 공개되지 않는다. 감독의 작전지시가 전달되기도 하고, 휴식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를 확인하는 은밀한 곳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
프로축구경기가 열리는 종합운동장 및 축구전용구장, 농구경기가 펼쳐지는 실내체육관, 프로야구경기장 등에는 라커룸이 설치돼 있다. 라커룸에는 선수들이 사용할 수 있는 사물함과 의자가 놓여 있고, 작전지시나 메모사항을 전달할 수 있는 보드와 텔레비전 등이 설치돼 있다.
선수들은 경기 전 이곳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하며 감독의 작전지시를 받는다. 축구의 경우 15분간의 하프타임 때도 사용된다. 또 경기 뒤에도 팀미팅을 하는 장소로 이용된다. 최근에는 삭막한 라커룸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구단마다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고 있다. 여자 프로농구 금호생명이 라커룸에 여성취향의 방향제를 비치하고, 프로야구 LG 트윈스가 건의함을 설치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종종 라커룸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즉 감독이나 코치들이 경기 결과를 놓고 선수들의 잘못을 추궁하며 물리력을 행사하는 장소로 ‘용도 변경’되는 것이다.
원로 축구인 P씨는 감독 시절 프로선수들을 라커룸에서 구타해 선수들의 집단 반발을 사기도 했다. 지난 2000년에는 여자프로농구팀의 한 감독이 라커룸에서 선수를 구타해 고막이 파열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당시 파문이 커지면서 해당 감독이 농구계에서 영구 제명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1990년대 초 프로야구 유명구단에서 벌어졌던 사건 하나. 당시 수위타자 경력까지 가진 고참급 선수 L은 경기 후 라커룸에서 후배 포수인 P에게 그 날의 투수리드가 잘못돼 많은 점수를 줬다며 야단을 쳤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P는 하늘 같은 선배인 L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극상 폭력사태에 구단은 쉬쉬하며 P를 2군에 내려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망주로 꼽혔던 그는 선수생활을 그만둬야만 했다.
다른 팀 선수들끼리의 폭력사태가 라커룸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 1995년 프로축구선수 S는 경기중 상대팀 용병선수의 집요한 마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동반퇴장 당했다. S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상대팀 라커룸으로 쳐들어가 용병선수의 멱살을 잡고 난투극을 벌였다. S는 우리말로, 용병선수는 영어로 서로 욕을 해대며 주먹을 휘두른 것.
퍼거슨 감독의 경우처럼 라커룸에서 축구화가 날아다닌 경우도 있었다. 현재 프로축구팀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A씨는 70년대 국내 최고의 공격수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국제경기에서 전반전이 끝난 뒤 감독이 교체지시를 내리자 라커룸에서 축구화를 집어던지며 강력하게 항의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베컴에게 축구화를 집어 찬 퍼거슨 감독의 ‘선배’인 셈.
라커룸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도 볼 수 있다. 지난해 아시안게임 4강전에서 복병 이란에 패한 뒤 승부차기에 실패한 이영표가 라커룸에서 울음을 터뜨려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밖에도 라커룸에는 기막힌 사연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전쟁만큼 치열한 것이 스포츠의 세계이다보니 라커룸이 애꿎은 화풀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난해 월드컵 기간중 개막전에서 패한 프랑스와 우리나라와의 8강전에서 물러난 이탈리아가 경기 뒤 라커룸을 부순 경우처럼 라커룸이 샌드백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국내 스포츠계에서는 엄격한 위계질서 탓인지 선수들이 라커룸을 훼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때때로 동료선수의 해괴한 징크스로 인해 라커룸이 곤혹스런 장소로 변하기도 한다. 90년대 초반, 해태타이거즈가 연승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심타자 H 때문에 당시 해태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코를 감싸야만 했다. H는 경기에서 승리하면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 독특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
팀이 8연승을 하는 10여 일 동안 H는 속옷을 한번도 갈아입지 않았다. 당시 광주구장의 해태 라커룸은 온돌방식. 아랫목이 따뜻한 라커룸은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찼고 선수들은 ‘차라리 한번 져주는 게 낫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다행히(?) 해태는 9연승에 실패했고 H는 속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라커룸의 구린 냄새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안순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