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전에서 투수가 던진 공에 얼굴을 맞아 부상 한 현대 심정수는 요즘 특수헬멧을 쓰고 출전중. | ||
빈볼(bean ball)은 타자의 머리를 겨냥하고 던지는 고의성 짙은 위협구다. 치명적인 부상은 물론 심지어 선수생명까지 위협하는 위험한 투구가 빈볼이다. 하지만 야구에서 빈볼은 ‘필요악’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투수들은 왜 빈볼을 던질 수밖에 없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봤다.
18.44m의 거리에서 시속 1백40km가 넘는 속도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야구공은 공포 그 자체다. 박노준 SBS해설위원은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해온 선수들이라고 무섭지 않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위력을 잘 알기 때문에 더 공포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투수들은 ‘위협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몸쪽 공으로 위협하면 타자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고 그때 던지는 바깥쪽 공은 위력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전략적 이유에서만 빈볼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벤치의 지시에 의해서 빈볼을 던지기도 한다.
[배짱투]
빈볼을 던지는 이유 중 그나마 가장 용납될 만한(?) 케이스. 공격적인 타격을 위해 홈플레이트에 가깝게 다가서는 타자들을 위협할 요량으로 빈볼성 볼을 던지는 경우다. 하지만 몇 차례 몸쪽 위협구에도 물러서지 않을 경우 직접 얼굴이나 몸통을 겨냥해 공을 뿌리기도 한다.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다 2001년 은퇴한 뒤 현재는 프로팀 2군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J선수는 현역시절 두둑한 배짱으로 악명이 높았다. J는 가장 큰 장점인 배짱을 바탕으로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는데 빈볼을 마다하지 않고 던지는 것으로 선수들에게 소문이 자자했다. 몸쪽 위협구에도 물러서지 않으면 곧바로 빈볼이 날아왔다는 것. 타자들 사이에서는 ‘두려운’ 투수로 손꼽혔다.
기아의 중심타자 이종범의 경우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공격적인 타격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배짱투를 던지는 투수와 맞붙어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종종 빈볼을 맞는다. 이종범이 빈볼에 자주 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지난 2001년 8월 삼성-한화전에서 양팀 선수들이 빈볼 시비에서 비롯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빈볼과 관련된 불문율이 있다. ‘상대투수가 우리 타자에게 빈볼을 던진 후에는 반드시 보복하라’는 것.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상대 투수가 고의성 짙은 빈볼을 던질 경우 다음 이닝에서 반드시 ‘보복’을 한다. 물론 이때도 암묵적인 룰은 있다. 타자의 머리가 아닌 몸통을 향해 던진다는 것. 만약 머리를 향해 보복투가 날아가는 경우 십중팔구 몸싸움이나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반면 보복투가 엉덩이 부분을 맞히면 타자는 괘념치 않고 1루로 달려나간다.
지난 2001년 삼성과 한화의 경기에서 벌어진 빈볼사건은 보복투의 전형이다. 이날 삼성 선발 임창용이 장종훈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지자 곧바로 한화 선발 한용덕이 이승엽에게 ‘보복’을 가했다. 빈볼의 경우 ‘중심타자’에게는 웬만해선 던지지 않는 게 관행인데 한화의 대표타자 장종훈에게 후배 임창용의 빈볼이 날아들자 삼성의 간판타자 이승엽에게 되돌려 준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감독은 지존의 자리다. 감독의 한마디에 수십 명의 선수들이 좌지우지된다. 마운드에 선 투수 역시 마찬가지다.
[주문투]
가끔씩 몇몇 감독이 투수에게 빈볼을 주문하는 경우가 있다. 본인들은 부인하지만 야구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감독들 가운데는 빈볼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연패 등으로 팀 분위기가 침체됐을 때 빈볼 싸움을 유도, 분위기 반전을 노린다는 것.
대표적인 감독으로 K가 꼽힌다. 선수단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그가 덕아웃에서 슬며시 코치에게 눈짓을 하면 의중을 알아차린 코치가 빈볼사인을 투수에게 전달하는 식이다. 이때 투수가 팀 내 에이스급인 경우는 거의 드물다. B급 투수이거나 연차가 어린 선수에게 빈볼을 던지는 악역을 맡기는 셈이다.
당연히 이들 투수들은 하늘 같은 감독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렵다. 하지만 감독의 빈볼 명령에도 차마 친한 상대 선수를 맞힐 수 없어 공을 타자 등 뒤로 던지다 2군으로 좌천된 경우도 있다.
드물지만 감독뿐 아니라 구단이 직접 빈볼에 ‘관여’한 적도 있다. 한 야구 관계자는 “90년대 중반 모 팀의 에이스가 라이벌 구단의 간판타자에게 빈볼을 던진 뒤 구단 관계자에게서 ‘용돈’을 받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응징투]
상대팀의 눈높이로 보자면 그라운드에서 유난히 얄미운 짓을 하는 선수들이 있게 마련. 이런 선수들에게는 언제 빈볼이 날아들지 모른다.
여기서 ‘얄미운 짓’이란 상대팀에 대한 매너상 그라운드에서 되도록 자제해야 하는 행동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홈런을 친 뒤 너무 요란한 제스처를 하며 베이스를 아주 천천히 돌거나,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경기 후반에 도루를 하거나, 노히트 노런 등 대기록을 앞둔 투수를 상대로 기습 번트를 대는 것 등이다. 또 상대 배터리의 사인을 훔치는 것도 빈볼을 유발하는 이유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기분이 나빠진 투수가 빈볼로 ‘응징’에 나서는 사례가 종종 있다.
80년대를 대표했던 강타자 이만수는 홈런만큼이나 몸에 맞는 볼을 많이 맞았다. 그 이유 중엔 그가 홈런을 친 뒤 두 손을 치켜들며 요란한 세리머니를 하며 천천히 베이스를 돈 데다 경기가 끝난 뒤 “맞는 순간 홈런일 줄 알았다”고 인터뷰하는 등 투수들의 신경을 긁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반면 이승엽의 경우 홈런을 쳐도 재빨리 베이스를 돌고 ‘겸손한’ 인터뷰를 해 홈런을 맞은 투수들에게서도 별다른 감정을 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지난 2001년 시즌 중반 삼성 주장 김태균은 두산 주장 안경현을 찾아가 “우리 감독은 경기 후반에 7, 8점을 앞서도 도루사인을 낸다”며 “그게 선수 개인의 의도가 아니니 위협구를 던지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주변에서는 그럴 경우엔 투수가 덕아웃의 상대팀 감독을 향해 공을 던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기도 했다. 안순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