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 신나는 골사냥을 하다 갑자기 벤치신세를 자주 지며 국내팬들에게 의아함을 안겨줬던 설 기현은 자신의 빅리그에 대한 갈망이 ‘부작용’ 을 일으킨 탓이라고 고백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사인 공세는 물론이고 몇몇 아줌마들은 “진짜 설기현 맞냐”며 손을 잡고 얼굴을 만져보면서 “TV에선 엄청 커 보이던데 실제로 보니까 얼굴이 주먹만 하다”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어렵게 빈방을 잡고 들어가 앉아 있는데 이번엔 종업원들이 난리다. 급기야 사장 할머니까지 나오셔서 둘둘 만 벽지를 쫙 펴더니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옆에서 지켜보기가 미안해 힘들지 않냐고 묻자 “익숙해진 편이에요. 벨기에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어요. 한국에서만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 기분 좋게 받아들이려고 해요”라며 가볍게 넘긴다.
술이 약하다고 해서 소주 대신 시킨 과실주에다 얼큰한 두부찌개를 안주 삼아 먹는 자리에서 설기현은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취중토크’ 첫머리에선 이영표가 ‘안줏감’으로 떠올랐다. 가장 친하다고 소문난 사이라 그런지 설기현은 이영표를 ‘안주거리’로 삼는 데 대해 아무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영표형이 우리집에 놀러온다고 하더니 결국 안 오더라고요. 혹시 그 이유를 아세요? 어느날 저녁에 전화를 걸어선 ‘벨기에로 건너오겠다’며 ‘무슨 선물이 좋겠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내 아들 인웅이가 벽걸이 TV를 좋아하니까 그거 사가지고 오라’고 했죠. 그후론 소식을 딱 끊더라고요.”
선수들 사이에서 ‘짠돌이’로 소문 난 이영표에게 9개월 된 아들 선물로 벽걸이 TV를 사오라고 했으니 연락을 두절한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설기현은 벽걸이 TV는 정말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이영표가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설기현이 소속된 안더레흐트에는 선수들의 출신지별로 주류와 비주류가 형성돼 있다고 한다. 동구권인 유고, 폴란드와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선수들이 주류와 비주류로 양분돼 있다는 것. 따라서 ‘제3의 세력’으로 불리는 한국의 설기현과 핀란드, 오스트리아 출신의 선수들은 ‘왕따’의 동질감을 안고 절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루는 스페인의 라스팔마스와 친선 경기가 예정돼 있어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날 구단의 지시 사항을 전달 받아야 했다. 영어가 짧은 설기현은 친한 핀란드 선수에게 전달 사항에 대해 물었고 핀란드 선수는 ‘내일 모두 정장 차림을 하고 집합하라고 했다’는 메시지를 전해줬다.
▲ 설기현이 기자와 함께 인터뷰 장소 인근의 숲길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
“경기 후 새벽에 선수들 모두 나이트 클럽에 갔었어요. 전 사복을 준비하지 않아 안더레흐트 마크가 큼지막하게 찍혀 있는 ‘츄리닝’을 입고 한쪽 구석에서 쭈그리고 있었죠. 그런데 선수들이 자꾸 춤을 추라고 끌어내는 거예요. 전 필사적으로 안 나가려고 했고. 그런데 양주에다 콜라 탄 술을 몇 잔 마시다보니까 용기가 나더라고요. 츄리닝 윗옷을 손에 들고 허공을 향해 빙빙 돌리며 힙합춤을 췄는데 나중엔 선수들이 들어가라고 말리더군요.”
잠시 시계를 아득한 과거로 돌려봤다. 고등학교 축구부 시절 단체로 가출했던 경험담을 들으면서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기현은 재미난 이야기를 하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흥미를 배가시켜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강릉 촌놈이 청량리역에 도착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면목동 가면 일거리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친구들과 그곳으로 향했죠. 전 셔츠 공장에서 단순 보조 업무를 맡았는데 하루는 식사 중에 제가 고등어 두 토막을 다 먹었다고 해서 기존의 공장 직원들과 싸움이 붙었어요. 결국 그곳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 학교에서 복귀하지 않으면 무조건 퇴학이라고 하는 바람에 겁이 난 우리들은 다시 강릉으로 향했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축구를 안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다신 축구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한 친구들이 어느날 등교길에 보니까 축구부원들과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순간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그 자신도 감독을 찾아가 백배 사죄하며 제발 공만 차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 빼놓고는 같이 놀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려하기만 했던 지난해 월드컵 이후 설기현은 시련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특히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잦은 교체 출장으로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냈고 평생의 꿈인 잉글랜드 빅리그 진출이 좌절되는 등 말 못할 가슴앓이를 겪었다.
“월드컵 이후 거칠 게 없었어요. 자신감이 지나쳐 자만했다고나 할까.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벨기에 리그가 너무 우습게 보였고 무조건 프리미어리그 진출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었죠. 당연히 게임을 뛰면서 전력을 다하지 못했어요. 그러다보니 주전에서 제외되고 벤치 신세로까지 전락했어요. 처음엔 선수들이 ‘네가 게임 못뛰는 걸 이해할 수 없다’며 내 편에서 감독을 씹었는데 내 자리를 폴란드 선수가 차고 들어오며 연일 승승장구하니까 나중엔 아무도 내 걱정을 해주지 않더라고요.”
어느덧 월드컵 1주년을 맞는 시점이 되다보니 설기현도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월드컵을 통해 축구를 보는 안목은 물론, 세상 보는 시각도 조금은 달라졌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이요? 물론 생각이 많이 나죠. 고집스런 얼굴이 가장 많이 떠올라요. 자기 의지대로 팀을 끌고 나가는 강단만큼은 꼭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만약 그분 밑에서 다시 선수 생활하라고 한다면 싫어요. 왠지 불편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설기현이 월드컵 때 동고동락했던 선수들에 대한 ‘소감’을 짤막하게 정리해줬다. 박지성 ‘순둥이’, 이영표 ‘이사기’(하도 ‘사기’를 많이 쳐서), 송종국 ‘송사발’(‘구라’가 심하단다), 이천수 ‘당돌맨’, 안정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그리고 황선홍이란 이름이 나오자 이런 사연을 털어놓는다.
“한때 선홍이형을 라이벌로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겹치는 포지션 때문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형을 라이벌로 여겼던 제가 너무 창피해요. 진짜 형의 라이벌이 될 수 있도록 실력과 품격을 키워야겠죠. 그땐 당당히 말할 거예요. 선홍이형을 영원한 라이벌로 생각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