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막이 터질 듯한 엔진음과 시속 2백50km를 넘나드는 포뮬러카에 빠져 ‘인생을 저당 잡힌 사나이’를 만나기 위해선 그렇게 적잖은 ‘공부’가 필요했다.
한국인 최초로 유로 F3무대에 진출한 이동욱(30·이탈리아 드루멜 레이싱팀). 그는 ‘레이싱 드라이버’답지(?)않게 차분하고 침착한 어투로 레이싱에 관해 문외한이나 다름 없는 기자와의 ‘강의식’ 인터뷰에 나섰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먼저 레이싱 드라이버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허물어야 했다. 콩글리시 버전으로 카레이서하면 거칠고 급한 성격으로 대변될 것 같았지만 이동욱은 경력이 많은 드라이버일수록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레이싱 드라이버가 일반 승용차를 운전하면 어떻게 될까. 차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일반도로에서의 경주를 즐기리란 예상은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느 운전자보다 신호등, 차간 거리, 정지선 등 교통법규만큼은 확실히 지킨다고 한다.
이동욱은 유독 ‘최초’라는 타이틀과 친숙하다. 한국인 최초의 아시아F3 우승자이고 역시 최초로 유럽 레이싱팀에 입단했으며, 또 최초로 유로 F3시리즈 대회에 참가하며 이동욱이란 이름을 세계 레이싱 무대에 널리 알렸다.
F3란 국제자동차연맹(FIA)이 인정하는 공식 포뮬러 경기 중 F1, F3000에 이어 막내 등급에 해당하는 경주다. F3에서 일정 성적을 올리면 곧바로 F1(독일의 미하엘 슈마허가 대표적인 F1 드라이버다)이나 F3000에 진출할 수 있다. 이동욱은 세계 최고의 포뮬러 경기인 F1으로 올라가기 위해 F3 대회 투어중이다. F3 경기는 평균 관중 10만 명이 모이고 세계 1백여 국에 중계되기도 한다.
이동욱의 전직은 뜻밖에도 사진작가. 사진을 전공한 후 개인 스튜디오까지 운영하던 그가 레이싱 드라이버로 전업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운명적인 끌림 때문이었다.
“96년 춘천에서 아마추어 대상 슬라럼 대회에서 1위로 입상한 게 모든 걸 바꿔놓았어요. 가장 좋아하는 한 가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래도 레이싱에는 사진작가라는 천직을 포기하게끔 하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후 크고 작은 국내 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에 입상하는 등 이동욱은 뒤늦게 시작한 레이싱 드라이버 생활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동욱의 이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9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포뮬러3 대회 우승자 반열에 오르면서부터.
▲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세상 밖으로의 탈출을 꿈꾼 이동욱은 세계 명문 레이싱팀인 이탈리아 드루멜 레이싱팀 오디션에 응시하게 된다.
“처음엔 미캐닉(정비요원)들이 비협조적이었어요. 동양인 출신이고 경력이 미천한 탓에 무시하는 태도가 역력했거든요. 이틀 동안 테스트하면서 머신에 적응하게 되고 가지고 있던 실력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죠. 유럽 정상급 드라이버에 비해 손색이 없는 데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결국 드루멜팀에 입단할 수 있었어요.”
이탈리아 레이싱팀 입단 후 2003년 4월 독일 호켄하임에서 열린 유로 F3 개막전에 출전하기까지 이동욱은 험난한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이동욱의 도전이 마치 동남아 출신 선수가 한국에 와서 스키를 하겠다고 나서는 거나 마찬가지의 모양새였다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으면서도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대회 다음 라운드 참가조차 힘든 지경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팀에서 연봉을 지급하지 않아요. 머신과 스태프는 지원하지만 대회 참가비용은 레이서 몫이거든요. 하루 빨리 스폰서를 찾아야 하는데 좀 힘든 상황이에요. 국내도 아니고 유럽 F3에서 자사 로고가 박힌 유니폼이나 헬멧 등을 쓰고 달리는 건 엄청난 홍보 효과를 낼 수 있는데도 말이죠.”
그동안 숱한 난관을 헤쳐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크게 절망하거나 좌절하진 않는다고 한다. 단 시간이 지체될수록 대회 출전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에 조바심이 나는 건 사실이다. 유로 F3 꿈길을 달리려는 이동욱의 앞날이 ‘무·한·질·주’이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