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기자의 외침이 아니었다. ‘취재원’의 신바람난(?) 자연스런 취중 멘트였다. 실로 오랜만에 강적을 만난 덕분에 태릉 한 갈비집에서의 ‘취중토크’는 혀도 꼬이고 말도 꼬이고 자꾸 배시시 웃음만 나오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업’된 상태였다.
지난 3일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세계배드민턴 선수권대회 혼합복식에서 라경민(26·대교눈높이)과 함께 우승컵을 거머쥔 김동문(27·삼성전기)을 ‘취중토크’ 대상자로 찜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조차 못했다.
5일 귀국한 김동문을 다음날 술자리로 불러내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섭외 과정이 조금은 수상쩍었지만, 시차 적응에다 대회 후유증 등 컨디션이 안 좋아서 술은 거의 하지 못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기자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술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수가 적을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쉼 없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이 ‘개그맨’ 김제동을 능가했다.
‘바늘과 실’로 비유되는 파트너 라경민을 선수촌에 남겨 놓고 혼자 나온 탓인지 그의 옆자리가 자꾸 허전해 보였지만 김동문은 ‘취중토크’에 걸맞은 술에 관한 에피소드를 먼저 털어놓으며 인터뷰의 재미를 업그레이드시켰다.
“98년 삼성전기 입사 환영회에서였어요. 당시 단장님, 감독님, 선수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생전 처음 ‘충성주’라는 폭탄주를 마시고 나니까 정신이 아찔하더라고요. 술보다 탁자에 머리를 하도 많이 부딪혀 더욱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날 술자리가 파한 뒤 숙소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약간 ‘문제’가 생겼어요. (하)태권이와 함께 서울역으로 갔거든요. 귀소본능이라고나 할까? 익산행 티켓을 끊어 모교인 원광대 기숙사로 들어가 잠을 잔 거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삼성전기엔 김동문을 비롯해 초등학교 단짝 친구인 하태권과 1년 선배인 이동수, 유용성이 소속돼 있다. 남자 복식에선 김동문-하태권, 이동수-유용성 조가 유명한 라이벌 관계인데 김동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표팀에 들어간 이후부터 두 팀의 라이벌 관계가 시작됐다고 한다.
처음엔 김동문의 파트너가 하태권이 아닌 이동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문-하태권으로 재정비된 이후부터 두 팀은 국내든 국제대회든 결승에서 자주 맞붙는 ‘적군’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김동문은 원래 단식선수였다.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단 것도 단식선수로서였다. 복식으로 전환한 것은 국제무대에서의 보잘 것 없는 성적 때문. 그는 나이가 조금만 더 어리다면 다시 단식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속내도 숨기지 않았다.
‘복식 인생’의 어려움은 파트너와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김동문은 남자 파트너로는 하태권을, 여자 파트너론 라경민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하태권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 ‘환상의 복식조’를 이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96년부터 짝을 이룬 라경민과는 한동안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해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경민이가 원체 말이 없어요. 한때는 3세트 게임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안한 적이 있었어요. 게임이 안 풀릴 땐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일방적인 내 지시만 듣고 플레이를 하다보면 게임이 꼬이게 마련이거든요. 코트에서 좋은 파트너가 되려면 코트 밖에서 자주 식사도 하고 때론 술도 한잔하면서 서로의 고민과 사생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김동문과 라경민의 경기 모습. | ||
“가끔 경민이와 ‘썸씽’이 있는 게 아니냐며 의심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아직은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는 ‘순정파’이기도 하답니다.”
과거의 애인 이야기를 하며 김동문은 소주 한 병을 또 추가했다.
“6년 동안 사귄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여러 차례 고비를 겪으면서도 관계가 잘 이어져왔는데 서로 바라는 사항이 너무나 달랐어요. 그 친구는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애인을 원했고 난 커리어우먼보다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현모양처를 바랐는데 양쪽 다 그 부분을 채워주기가 힘들었거든요. 지난해 설 때 헤어졌어요. 그후 몇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원점으로 되돌려 놓기가 어렵더라고요.”
여자친구와의 이별로 인한 상처가 꽤 깊은 듯했다. 감정적으론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이성적으론 되돌아가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리움을 포기하려고 애쓴다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김동문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갑자기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다 SK로 복귀한 투수 조진호에 대한 일화를 꺼냈다. 김동문과 조진호, 그리고 하태권은 초등학교 단짝 친구였다. 3명은 똑같이 배드민턴부원으로 선수 생활을 했는데 조진호가 야구부로 ‘이적’하면서 ‘꼴찌들의 반란’ 구도에 분열이 생겼다며 환하게 웃는다.
“처음 배드민턴을 시작했을 때 우리 셋은 꼴찌에서 순위 다툼을 할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어요. 진호는 자신의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야구가 멋있게 보인다는 이유로 야구부로 옮겨갔는데 그 순간에는 좀 야속한 생각도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선 저도 뒤따라 가고 싶었어요. 우물쭈물하다 그냥 주저앉았는데 결국 그 당시의 선택이 우리 셋의 운명을 갈라놓은 셈이 되고 말았죠.”
한국 셔틀콕의 ‘혼복불패’ 신화를 이룬 주인공 김동문.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를 계획중인 김동문한테 ‘취중토크’다운 질문을 던졌다.
“라경민 선수하고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닌가요?”
“주위에선 운동선수랑 결혼하는 게 더 좋다고 하더라고요. 경민이랑 잘 어울린다면서 잘 해보라고 부추기긴 하지만 남녀 사이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나요? 경민이도 참 괜찮은 사람인데….”
[김동문 오문오답]
Q:세계 최고의 스매싱맨을 꼽는다면?
A:하태권.
Q: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을 꼽는다면?
A:이 또한 한국 선수인 유동성.
Q:이전 파트너인 길영아와 지금의 라경민과의 차이점은?
A:길영아는 누나였고 라경민은 동생이라는 차이?
Q:가장 인상적이었던 대회는?
A:96애틀랜타올림픽 결승에서 박주봉-라경민 조와 나, 길영아 조가 맞붙었을 때. 주봉이형이랑 경기 전 같은 방을 썼는데 새벽 4시까지 서로 잠을 못이뤘다. 결국 우리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주봉이형이랑 같이 밤을 지샌 걸 두고 아마 ‘동상이몽’이라고 하지 않을까.
Q:혹시 짝사랑을 고백한 여자 후배 선수가 있나?
A:예스. 그러나 더 이상 진도는 안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