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일이 지난 8월15일 프로축구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평상심’을 되찾은 김남일은 최근 정교한 패스와 고감도 득점포를 쏘아 올리며 팀 공격을 주도하고 있다. ‘수비형’으로만 인식됐던 ‘한계’를 전면 부인하려는 듯 매 경기 필드 전체를 휘젓는 몸놀림이 상당히 매섭다.
예기치 않은 풍랑과 곤경에 처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있는 김남일. 6월과 8월에 걸쳐 자신의 국내 매니지먼트 업무를 담당하던 K씨가 두 건의 광고에 관한 ‘계약 불이행’을 내세우며 두 차례나 소송을 제기해 차압까지 당할 위기에 처해 있지만 ‘중심’을 곧추세운 채 리그 경기와 훈련에 전념하며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월드컵의 영광’,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좌절’,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 진정한 ‘명품’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지혜’를 체득했다는 김남일을 만나기 위해 8월28일 여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터뷰 섭외가 꽤나 어렵고 ‘어쩌다 마주쳐도’ 말을 가려서 하는 바람에 기자들을 진땀나게 하는 김남일이지만 불쑥 찾아온 ‘무대뽀’ 기자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단 둘이 드넓은 경기장에서 뻔히 얼굴만 쳐다볼 수만은 없는 일. 네 자 이상 대답을 하지 않기로 소문난 그도 ‘속사포’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김남일은 요즘 상한가다. 7월30일 대구전에서 프로 데뷔 2호골을 터트린 뒤 이후 3골 1도움의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은 물론 공격 공헌도까지 팀내 최고다. 트레이드마크인 타이트한 수비뿐 아니라 공격 일선에까지 가담하다보니 뛰는 양을 따져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강철, 김태영 등 고참들이 경기 도중에도 “그만 뛰어”라고 외칠 정도. 이것은 즉 쾌조의 컨디션이라는 방증이다. 줄곧 자신을 괴롭혀온 ‘공격력 부재’에 대한 비난을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 있게 돼 부담을 던 듯하지만 정작 그는 “아직은 미흡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그는 큰 눈을 굴리면서 이 기회에 코칭스태프와 동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야겠다며 제법 길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팀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도록 배려해줘서 힘이 돼요. 골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기 위해 활동 폭을 넓히다보니 자연스럽게 찬스가 나더군요. 요즘 주위에서 공이 커 보이냐고 물으시는데 솔직히 사실이에요(웃음). 그렇다고 오버하면 큰일나요. 안 그래도 요즘 가끔씩 감독님이 ‘자리 지켜! 자식아’라고 핀잔을 주세요. 조심해야죠.”
▲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남일(왼쪽). 그는 최근 그라운 드 안팎에서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
‘아직 멀었다’, ‘애물단지일 뿐’이라 외쳤던 이회택 감독뿐 아니라 ‘저승사자’ 정해성 코치도 이제는 먼발치에서 주저 없이 그를 ‘팀의 중심’이라 표현할 정도로 ‘터프가이’에 대한 신뢰는 각별하다.
“감사하죠. 그러나 그러한 부분에 연연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11명이 하는 스포츠니까요. 제 역할에 충실하면서 팀 성적만 신경 쓰고 싶어요.”
올 초 에레디비지(네덜란드 1부리그)에서의 활약, 특히 반 봄멜(에인트호벤), 보스펠트(당시 페예노르트·현 맨체스터 시티) 등 네덜란드 국가대표 출신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들과 겨뤄본 경험은 천금보다 값지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혼돈에 빠져 있던 그에게 확실한 답을 던져준 ‘짧지만 굵은’ 지난날이었다. 네덜란드 진출 전과 후, 무엇이 바뀌었을까?
“한마디로 여유가 생겼죠. 이제서야 저를 제어할 수 있을 듯해요.”
만 26세. 결혼 이야기가 나올 법한 시기다. 게다가 설기현, 이영표, 송종국 등 후배들이 총각 딱지를 뗐기 때문에 심히 마음의 동요가 있었을 것 같다. “부럽긴 한데 아직은”이라고 살짝 웃는 그에게 ‘결혼을 고려하는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묻자 하늘만 쳐다본다. 묵묵부답인가. 기대한 대답은 아니지만 “확실히 서른 넘어서 할 것”이라며 아직 결혼에 뜻이 없음을 밝힌다.
외로움은 동료들과 친구가 해결해준다는 김남일이다. 특히 숙소 같은 방을 쓰는 한 살 위 수비수 김정겸과는 남모르는 고민을 털어놓는 끈끈한 사이. 출신 학교는 다르지만 청소년 대표와 대학 선발을 함께 지내면서 오랜 우정을 쌓아왔다고 한다.
실패로 끝난 ‘유럽 진출’. 기량을 채 펼쳐보지도 못하고 쓸쓸히 귀국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이 아직 시리다고 한다. 대답이 갑자기 간단명료해진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않을 겁니다.” 무익한 승강이에 매달리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앞으로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마다 샘솟던 ‘오기’를 버리겠다는 김남일. ‘차분함과 여유’를 열정의 모태로 삼아 축구를 편하게 즐기고 싶다며 기자한테 ‘V’자를 그려 보였다. 갑자기 김남일이 훌쩍 커 버린 것 같다.
유재영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