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1일 선발 21연승이라는 세계기록을 달 성한 정민태. 팀 타선에 공을 돌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달 31일 선발 연승 세계신기록(21연승)을 달성한 뒤 쏟아지는 인터뷰 공세를 뒤로하고 또 다른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정민태(33·현대)는 ‘마운드의 황태자’답게 시종일관 예의 바른 태도로 자신의 야구 인생을 넉넉하게 풀어나갔다.
원래 술을 잘 못해 ‘취중토크’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수줍게 웃는 그가 너무 ‘바른 생활 사나이’로만 비쳐져 다소 ‘삐딱한’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래도 그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술이 몸에 안 맞아 안 마시는 것이지 못 마시는 게 아니라고 ‘정정보도’를 요구하던 그는 이내 미혼 시절 배우자를 고르던 엽기적(?) 기준을 고백해 기자를 기절 직전까지 몰고갔다.
“전배우자만큼은 까다롭게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서부터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상을 흠모해왔던 터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여자를 만날 때 현모양처를 원했죠. 조건이요? 무조건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되고 화장은 물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서도 안돼요. 그리고 제가 전화했을 때 집에 없어도 안되고. 만약 연애할 때 이 조건에서 벗어나면 바로 헤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기 전에 여자들이 견디질 못하고 떠나더라고요. 가장 길게 만났던 기간이 3개월이었으니까요.”
세상에 어떤 여자가 정민태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설명을 듣다보면 그 생각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반드시 제 짝이 있는 법.
지금의 아내 이태순씨를 만나 데이트 최장 기간 3개월을 넘기고 1년여 동안 만남을 이어가면서 그는 차분하고 사려 깊은 이씨의 이해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선 그가 까다로운 결혼 조건을 꺼낼 때마다 ‘장가가기 글렀다’며 혀를 찼지만 그는 내심 웃고 있었다. 이씨를 만난 후부턴 자신의 ‘선구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결국 스튜어디스 출신인 이씨를 내조 잘하는 야구선수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결혼 후 10년 동안 부부싸움 한번 안해봤다고 하니 성공도 대성공인 셈이다.
▲ 지난 7월17일 2003프로야구 올스타전에 등판한 정민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정민태에게 가장 잊지 못할 일은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보낸 2년간의 용병 생활일 것이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느낀 수치심, 비참함, 자책감 등을 한꺼번에 겪고 감내하며 ‘정민태’라는 이름의 가벼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고 한다.
“말 한마디 건네는 선수가 없었어요. 철저히 혼자였죠. 아무도 터치해주지 않는 삶이란, 그것도 야구장에서 ‘왕따’가 된 듯한 기분은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에 말로 표현 못할 어려움이 있었어요. 한순간도 외롭지 않은 날들이 없었어요. 더욱이 코칭스태프와 트러블까지 겪다보니 앞이 보이지가 않았죠. 3년 계약이었는데 1년을 남겨놓고 ‘백기’ 들고 돌아왔어요. 1년만 더 참았더라면 돈은 벌 수 있었겠지만 더 있다가는 정민태라는 야구선수가 사라질 것만 같더라고요.”
그는 일본 생활의 실패 요인을 실력이 뒤떨어져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타자를 상대하지 못할 만큼 ‘모자란’ 공이었다면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욱 연습에 매달렸겠지만 한국 선수에 대한 편견과 시기, 차별 등을 홀로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실패’라는 꼬리표를 달고 국내 무대에 U턴한 뒤에는 또 다른 ‘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실력에 대해 의문부호를 다는 기사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한국에 와도 내 편은 없구나’하는 서운함도 컸어요. 야구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도리밖에요. 그런데 타자들의 수준이 한층 업그레이드됐더라고요. 예전엔 3, 4번 타자만 잘 걸러내면 하위 타순은 상대하기가 수월했는데 지금은 1번부터 9번까지 쉬어가는 타순이 없는 거예요. 신인들도 기 싸움에서 지려고 하질 않아요. (투수는) 마운드에 서면 타자들을 압도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일본 갔다 오니까 2년 사이에 타자들의 눈빛에 도리어 압도당할 정도였어요.”
그는 시즌 초반 또다시 한국 야구에 적응하느라 무던히 고생을 해야 했다. 짧은 기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공백이 주는 무게를 실감한 뒤엔 국내 타자들을 연구하느라 날밤 새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대학 때 선배들 모시고 나이트클럽에 자주 갔었어요. 사실 그런 분위기를 싫어했지만 선배한테 맞지 않고 잘 보이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요. 덕분에 잘 놀았죠. 술은 프로 입단 후 팔꿈치 수술 받고 너무 괴로워서 양주 6잔을 마셨던 게 최고 기록이에요. 그런데 그거 마시고 반 죽는 줄 알았어요. 밤새도록 화장실 들락거리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죠. 그 다음부터는 술이 무서워서 못먹겠더라고요.”
술을 처음 마셔본 건 초등학교 때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친구분 집에 가서였다고 한다. 어른들이 ‘맥소롱’에 소주를 타서 마시는 모습을 마냥 지켜보는데 술 색깔이 너무 예쁘더란다. 결국 아버지 모르게 한 잔을 마신 것이 인사불성(?)으로 이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술을 못 마시는 게 야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사회 생활에선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어느 정도 술을 해야 남자답게 보이는데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뻘개지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때론 저보다 주위 사람들이 더 곤란해할 때도 있어요.”
그는 자신의 보수적이고 틀에 박힌 생활에 대해 약간의 갑갑함을 호소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쉽게 친해지고, 여러 방면의 사람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이어가야 하는데 성격상 그런 만남이 쉽지만은 않다고.
“21연승을 올린 다음에 인터넷을 보니까 비판의 글을 남겨놓으신 분들도 많더라고요. ‘기록도 기록같지 않은 기록 갖고 그런다’는 내용들이었죠. 물론 미국이나 일본 야구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죠. 그러나 전 개인적으로 제 기록의 배경에는 우리 팀 타자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타자들의 도움 없이 어떻게 선발 연승을 달성할 수 있었겠어요.”
‘최고’란 말보다 ‘최선’이란 말을 사랑한다는 정민태와의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그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을 넘지 못했다. 술과 별로 친하지 않은 취재원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말짱한 정신으로 ‘취중토크’를 끝낼 수 있었지만 술을 조금 더 했더라면 훨씬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한 정민태를 만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 인터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