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년여 동안 신인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자유계약 파동을 일으키며 ‘코트의 미아’ ‘코트의 풍운아’로 배구계 언저리를 맴돈 이경수(24·LG화재)가 드디어 국내 코트에 설 수 있게 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지난 9월24일 경기도 이천의 LG체육관을 찾았다(5일 후인 29일 대한배구협회와 LG화재는 법원의 조정안에 최종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이경수는 30일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 전국체전과 실업연맹전, 올 겨울 슈퍼리그(가칭 V투어)에 LG화재 유니폼을 입고 뛸 수 있게 됐다).
이경수는 대표팀 소속으로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한 후인 23일 귀국했기 때문인지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노진수 감독의 배려로 가볍게 몸 푸는 운동으로만 훈련을 대신한 뒤 체육관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인터뷰에 응한 이경수는 “휴가 좀 갔으면 좋겠다”며 피곤함을 호소했다. 정확히 1년 9개월을 끈 자유계약 파동 문제가 드디어 해결된다는 속시원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컨디션 때문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자신의 진로가 불안한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일이 번복됐던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확실히 매듭짓기 전에는 김칫국부터 마시기가 부담스러워요. 지금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고요. 국내경기의 첫 테이프를 끊는 순간이 돼야 실감이 좀 날까요? 조마조마하네요.”
이경수는 대학 졸업 후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에 2년이란 세월을 허송한 부분에 대해 진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어느 정도의 폭풍이 몰아치리라곤 예상했지만 선수생활이 위기에 놓일 만큼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구를 시작해서 15년을 뛰어왔어요. 그 대가가 ‘반쪽짜리’ 선수더라고요. 아무리 ‘거포’나 ‘대어’면 뭐합니까. 정작 경기에 나가지도 못하고 코트 밖에서 공이나 줍고 물이나 따라주면서 2년을 보냈는데. 원망도 해보고 야속함을 곱씹기도 하고, 하여튼 고행의 시간을 보내며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런데 ‘취중토크’에서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만 해도 되는 건가요?”
이경수는 술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며 맥주를 시켰다. 원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탓에 너무 힘들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하는 극한 상황에서만 폭주를 한다고.
“대학 4학년 때 여름부터 자꾸 꼬이는 일들로 인해 괴로운 나날을 보냈어요. 소주 2병까지 마셔봤어요. 술로 현실을 잊는 기분이 어떤지를 조금은 알 수 있겠더라고요. 그때 태어나서 제일 술을 많이 마셔봤던 것 같아요. 아,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이 주도한 자리에서 5분 만에 소주 1병 반을 들이켰어요. 그리고 5분 후에 기절했죠. 그래서 신입생 환영회 때 ‘사발식’은 피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선배들이 절 피해간 거였어요. 기절한 상태의 저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 키(2m)가 보통 큽니까.”
▲ 2년여 동안 국내코트에 서지 못했던 이경수가 30일 드래프트를 거쳐 LG화재에 입단하게 됐 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무척 힘든 ‘벽’으로 느껴졌어요. 특히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을 때마다 원망 아닌 원망도 해보며 학교 다니기 싫을 때도 많았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전 불효자예요. 부모님께서 너무나 힘들게 뒷바라지하셨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의사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말할 만큼 몸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고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부모는 건강이 좋지 않은 아들을 눈물로 키우며 ‘오래’ 살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부모의 정성 때문인지 이경수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 그것도 배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운동은 병치레 예방 차원에서 시작된 거였어요. 어머니가 배구를 하다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처음엔 배구공이 겁나기도 했어요. 키 큰 것 빼놓고는 워낙 몸이 약해 운동선수로 생활하는 것조차 버거웠죠.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막내아들 사람 만들겠다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뛰어다니셨던 부모님을 떠올리면 결코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경수는 만약 결혼해서 아들이 태어나면 절대로 운동을 시키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아들이 고집을 피우면 ‘절연’을 선언해서라도 운동선수로 키우고 싶지 않다는 속내였는데 자신이 선수생활을 힘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자유계약 파동 이후 이경수가 코트에 선 곳은 소속팀이 아닌 대표팀. 즉 국내가 아닌 국제대회의 참가는 허락한다는 협회의 ‘이상한’ 규정에 의해 이경수는 태극마크를 달고 코트를 누빌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표팀에 큰 애착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국내는 안되고 국제대회는 가능하다는 논리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아예 풀어 주든지 아니면 국제대회도 뛰지 못하게 하든지 해야지 자신들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선수의 진로를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대표팀에서 베스트를 할 수가 없었어요. 제 처지 때문인지 왠지 주눅만 들고. 여전히 답답했죠.”
제도를 거부하고 홀로서기를 선언했다가 결국 생채기만 안고 다시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심정이 궁금했다.
“불안해요. 오늘 계속 ‘불안하다’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래요. 무엇보다 경기 감각이 떨어진 상태에서 정상적인 선수생활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햇수로는 프로 2년차인데 다른 2년차들처럼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고요. 아마 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어디 얼마나 잘하나 두고보자’며 눈 크게 뜨고 지켜보실 거예요. 이토록 어렵게 시작한 실업팀 생활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정말 큰일이겠죠? 마음만 급해져요.”
식사하면서, 그것도 술까지 곁들이며 인터뷰를 하기란 난생 처음이라며 어색해했던 이경수의 말문이 트일 무렵 정작 인터뷰는 끝나가고 있었다. 어둡고 피곤했던 얼굴도 활짝 개었고, 만난 지 4백10일째라는 여자친구를 떠올릴 때는 드물게 천진난만한 표정도 지어 보였다. 여자친구 앞에서만큼은 애교와 유머를 달고 산다는 ‘확인 불가능한’ 이야기 속에선 ‘풍운아’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온갖 굴레와 제재들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도약을 향해 발을 내딛는 이경수에게 부디 행운만이 찾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