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화재배에서 새까만 후배 박영훈과 겨루면서도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조치훈 9단(오른쪽과 원안). 유독 세계대회와 인연이 없던 그는 12년 만에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 ||
조훈현은 승부에서도, 이벤트에서도 빛을 발한다. 조훈현은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조치훈은 승부에서 처절할 뿐, 이벤트에는 별로 소질이 없어 보인다. 승부가 처절해 영광의 정점과 나락 사이를 오르내렸다. 전치 6개월의 중상으로 휠체어를 타고 승부를 하는 사람은 조치훈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다. 가장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라이벌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가 절치부심, 와신상담, 고스란히 되찾아온 사람도 조치훈 전에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다.
조치훈은 우리를 숙연케 한다. 1분의 시간으로, 초읽기에 쫓기면서 허둥지둥, 벌게진 얼굴,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하는 맹수처럼 몸을 뒤척이며, 한 수 한 수를 마치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 듯, 바둑판에 던지는 그의 모습은 우리를 숙연케 한다. 그렇게 사력을 다해 겨우 겨우 한 판을 이기는 그를 보고 어찌 환호가 일 것인가. 이겨도 안타까운 조치훈.
그가 세계챔피언의 한 자리에 올랐다. 12년 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12년 만에’ 같은 것은 애당초 의식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 바둑계를 두 번이나 통일한 실력자이면서도 세계무대에서는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까워한 것은 관전객들이었고 정작 본인은 계속 지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핑계도 대지 않고, 계속 나와서 계속 똑같은 모습으로 초반 50여 수가 지나면 언제나 1분 초읽기에 몰리며 바둑을 두었다. 제한시간 8∼10시간의 이틀걸이 바둑의 왕자가 3시간짜리 바둑에 나와서 번번이 지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아닐까 신경을 쓰는 모습도 아니었다.
바둑이 기예라면, 기예의 한 분야에서 운명처럼 걸어가는 대가가 우리 옆에 있다는 사실은 너무 즐거운 일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
[1도] 욕심
제3국의 종반이다. 조치훈이 백이다. 한두 번 엎치락뒤치락한 후에 지금은 흑 우세. 박영훈은 우세를 확정지으려 좌하귀에서 흑1부터 수를 내고 있다. 백진이 허술해 수가 날만한 곳이다.
백은 2로 받는 정도인데, 흑은 5·7에서 11로 호구치며 완생태세. 백12 단수에 흑은 A로 받아 패를 해도 충분하다. 살지 못하더라도 패의 대가를 얻어내면 된다. 그러나 흑13으로 이어 버려도 지금은 살 수 있다. 백B 치중해도 흑C가 선수이기 때문이다.
귀가 살아선 승부도 끝인가? 산술적으로는 그래야 한다. 그러나 흑이 귀살이에 성공한 바로 그 순간부터 승부의 여신은 다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흑은 귀살이까기 욕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흑5로는 그냥 D의 곳을 잇고, 백E로 귀를 지킬 때 흑F를 선수하고, 흑G와 백H를 문답한 후 흑I로 젖혀 백 두 점을 걷어 넣어 충분했다.
[2도] 대역전
백1로 묘한 곳을 하나 긁어놓고 3으로 끊었는데, 흑4로 잡는 순간 바둑은 역전이었다. 백5 젖힌 후 7쪽을 끊고 9로 빠지니 흑은 응수가 없다. 흑A는 백B로 삼각형으로 표시된 흑돌들이 뭉텅이로 떨어진다. 흑이 이 돌들을 살리면, 백A, 흑C에서 백D로 돌려치고 흑E 때리고 백F 몰고 흑이 삼각형으로 표시된 백의 곳을 이을 때 백G로 몰아 이쪽 흑 석 점을 잡는다.
[3도] 길은 있었다.
흑1이 재난을 피하는 길, 마지막 시험을 넘는 길이었다. 백2가 있는 듯하나 흑3이 묘수. 백4·6에는 흑5·7로 그만인 것. 다음 백A는 흑B로 백이 수부족. 백4로 A면 흑C로 돌려치며 연결한다.
[4도] 수는 있었다.
백도 그냥 1부터 끊었으면 수는 있었다. 흑2∼6 때 백7이 교묘한 수. 흑8이면 백9로 늘어 백A의 축을 본다. 백7이 축머리인 것. 계속해서 ―
[5도]기막힌 맥점
흑1이 기발한 방어책이지만, 백2부터 흑7까지 외길로 몰아붙인 다음 백8. 흑의 명맥을 끊는 기막힌 맥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