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어긋나기만 했던 왕년의 ‘탁구 여왕’ 현정화 코치(34·한국마사회)와의 인터뷰를 약속한 날은 그와 관련된 자료에서부터 당시 취재를 맡았던 선배 기자들의 취재 일화, 그리고 최근의 소식 등을 수집하며 모처럼 신바람을 낼 수 있었다. 섭외를 하기 위해 전화통화를 하며 ‘술을 잘 하냐’는 가벼운 물음에 ‘저 술 잘 마셔요’라고 주저 없이 시인하는 씩씩한 목소리에선 앞으로 펼쳐질 범상치 않은(?) ‘취중토크’를 예감할 수 있었다.
연말과 연초의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마감 직전에야 얼굴을 볼 수 있는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서울 세검정 언저리의 굴국밥집에서 현 코치와 나눠 마신 소주의 뒷맛은 꽤 깊고 진한 여운을 남겼다.
12월을 완전 정리하기 직전인 지난 30일 매스컴에선 ‘현정화 여자탁구대표팀 코치가 2004아테네올림픽을 8개월여 앞두고 대표팀을 떠난다’는 내용의 기사를 앞다퉈 다뤘다. 사퇴 배경으론 가정과 일을 병행하는 데 따른 체력 저하가 거론됐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남자선수들도 당하지 못할 만큼 강단이 있는 그녀가 체력 열세를 이유로 물러난다는 건 현 코치를 잘 모를 때만 가능한 ‘설정’이었다.
“눈치채셨어요? 음, 주변에서 돌아가는 상황들이 그만둘 수밖에 없게 하더라고요. 세상에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죠. 그렇다고 완전히 대표팀을 떠난 건 아닙니다. 언젠가 제 ‘말발’이 먹혀 들어가고 주변 환경이 정리가 됐을 때 제자리를 찾아갈 거예요.”
현 코치는 ‘오프’를 전제로 사퇴한 진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지만 비보도를 약속했기 때문에 분위기만 암시하는 차원에서 ‘냄새’를 피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름길을 놔두고 샛길로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과 속상함은 가득해도 어떤 길이든 포기하지 않겠다는 끈질김만은 선수 때나 지도자가 된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연예인도 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여자선수 중 화장품 모델(한국화장품 CF 모델)을 했던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걸요?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패권을 차지한 한국 선수도 아직까진 저 혼자고요. 그래서 아쉬움이 없어요. 우승과 함께 은퇴라는 화려한 시나리오를 계획한 것도 미련이 없기 때문이었죠.”
은퇴 후 탁구 주니어 대표 출신인 김석만씨(34)와의 열애설이 터지며 현 코치는 또다시 언론의 집중 취재 대상이 됐다. “조용히 연애했다가 짠하고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었는데 그만 중간에 기자들한테 들통나고 말았어요. 사실 남편과의 연애 사실을 제일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이 북한의 리분희 언니였어요.
국제대회에서 만날 때마다 인연을 쌓은 것이 속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가까워졌는데 당시 ‘일급비밀’에 속했던 남자친구 이야기를 분희 언니한테 고백한 걸 보면 언니를 친언니 이상으로 생각했던 거 같아요. 기자들 몰래 제 이름을 새긴 반지를 선물해줄 정도였으니까요.”
외모에서 주는 선입견과는 전혀 딴판인 실제의 모습은 훨씬 인간적인 친근감을 더하며 현 코치의 고정된 이미지를 허물어뜨렸다. 어렸을 때부터 ‘공인’으로 살아온 이력 때문인지 아니면 두 아이를 둔 아줌마라는 타이틀을 안고 있어서인지 흘깃흘깃 쳐다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워낙 익숙해졌는 걸요. 전 대중목욕탕에도 잘 가요. 사람들이 아는 척하면 반갑게 인사하고 식당에서 사인 요청 받으면 정성스럽게 사인해드리면 되거든요. 공인이라서 불편하기보다는 혜택 보는 게 훨씬 더 많아요. 택시비 안 받는 아저씨도 많고 식당에 가면 음식 공짜로 주시는 분들도 있고 신호 위반에 걸리면 딱지 끊는 대신 사인해달라는 아저씨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이런 얘기가 알려지면 앞으로 봐주시는 분이 없을 것 같네.”
술에 대한 에피소드를 묻자, 스무 살 때 국내대회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낸 후 양주 한 병 반을 쏟아부은 ‘사건’을 털어놓았다.
결혼 후 현 코치의 최고의 술 파트너는 남편. 두 사람 다 맨정신에는 말주변도 없고 유머랑은 담 쌓고 지내는 성격이지만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말도 많아지고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유쾌해지는 스타일이라 요즘에도 식사하며 반주로 술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신혼 때 김치찌개 하나만 끓여 놓고도 소주 마시며 엄청 기분 내곤 했었어요. 결혼 전에는 술 마시고 한창 기분 좋을 때 숙소에 들어가야 하는 ‘아픔’이 있었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오버할 때 오버해도 되고, 기분 내고 싶을 때 기분 내도 되는 그런 자유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였어요.”
현 코치의 술 실력은 가끔 선수들과의 회식 자리에서도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대회를 마친 뒤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돌리며 “우리 오늘 이거 마시고 다 죽어버리자!”고 외친 뒤 원샷을 한다고. 그 순간만큼은 선수들의 코치가 아닌 언니로 신분을 낮춘(?) 뒤 선수들과 함께 예전 현역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 속에 빠진단다.
“스포츠 세계가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게 싫어요. 남성들이 여성보다 월등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말 그건 대단한 착각이에요. 여성 특유의 감성이나 그걸 바탕으로 한 지도력은 남성들 못지않거든요. 그걸 보여주고 싶어요.”
다음에는 서로의 신분을 털고 현 코치는 소주를, 기자는 안주를 사기로 굳게 약속한 다음 헤어지는데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저, 대표팀 코치 완전히 그만둔 거 아니에요. 꼭 다시 들어갈 거예요. 두고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