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수에 찬 눈빛. 연세대 시절 실력도 실력이지만 문경은은 이 눈빛으로 많은 소녀 팬들을 사로잡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스키를 처음 접해본 선수들은 스키장보다는 숙소에서 ‘동양화’ 감상에 심취하는 바람에 문경은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자비를 털어 후배들을 배려한 ‘보스’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에는 감동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올스타전 이후 공식적으론 4일을 쉬었다고 해도 이런저런 행사와 인터뷰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문경은은 ‘취중토크’ 자리에 나와서 연신 알레르기 현상을 동반한 재채기에다 콧물, 눈물까지 흘리며 ‘모성본능’을 자극시켰다.
그는 시즌 중인 데다 컨디션까지 좋지 않아 즐겨 마신다는 술을 앞에 놓고 고민에 빠지면서도 나이를 잊게 하는 유머와 재치로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끄는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난 5일 부천의 한 백화점 식당가에서 중화요리를 밥 겸 안주로 곁들인 문경은과의 시끌벅적한 술자리를 지면으로 옮겨본다.
“술안 마셔도 술 취해 보이지 않아요?”
초기 감기 증세를 나타내는 징후들로 눈 부위가 빨갛게 되자 문경은은 술잔을 받아들며 익살을 부렸다. 적당히 장난기 있고, 적당히 진지하면서, 또 적당히 로맨틱한 이미지는 아마도 약간 처진 눈 때문인 듯했다.
“이 눈 때문에 ‘람보’라는 별명이 붙은 거잖아요. (우람한 체격으로 인해 생긴 별명 아니냐는 물음에) 체격은 무슨 체격. 처진 눈이 실베스터 스탤론과 닮았다고 해서 어느 기자분이 붙여준 별명이라니까요. 하하.”
올스타전에서 받은 MVP상에 대한 인사말이 필요했다. MVP는 그가 데뷔 7년 만에 거머쥔 영광스런 상이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상복이 없었어요. 상 욕심이 많았는데 상은 안 주더라고요. 특히 올스타전 MVP는 정말 최고의 스타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선수한테 주는 상이잖아요. 해마다 ‘찜’해놓고 은근히 기다렸는데 이제야 주시네요. 은퇴하기 전에 성공해서 다행이죠. 뭐.”
팀의 최고참이자 주장인 문경은. 마냥 온화하고 유순한 이미지의 그한테 과연 보스다운 카리스마가 있을까.
“(옆에서 열심히 식사중인 후배이자 매니저인 김기정씨한테) 야, 나한테 카리스마가 있냐? (‘좀 있긴 하지’라는 대답을 듣고 씩 웃으며) 보스라는 게 항상 인상 쓰고 다니는 건 아니라고 봐요. 팀 분위기 안 좋을 때 후배들 앞에서 재롱도 떨고, 분위기 좋을 땐 듣기 싫을 만큼 잔소리도 하고, 상황에 따라 분위기를 바꿔줄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애들이 사랑(?)해줘요. 무게만 잡고 있으면 씨도 안 먹힐 걸요. 왜 예전엔 선배 말이라면 ‘노우’하는 법이 없었잖아요. 요즘엔 안그래요. 술 먹자고 하면 ‘여자친구 만나야 한다’, ‘약속 있다’면서 거절해요. 그 부분도 인정해줘야 해요.”
선배들 손에 이끌려 다녔던 문경은이 어느새 후배들을 끌고 가야 하는 나이가 됐다. 후배들의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접할 때마다 열도 받고 흥분을 하기도 하지만 ‘흐름에 순응해야 조직을 이끌 수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이 지도자를 꿈꾸는 문경은에게는 중요한 경험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글 내용처럼 대학 때 유흥가 방문을 꽤 좋아했어요. 대학 입학 후 이전까지 맛보지 못했던 별천지 같은 세상을 알고 나선 그 세계가 너무 신기했죠. 틈만 나면 형들이랑 강남, 압구정동을 누비고 다녔어요. 거의 매일 기절하다시피해서 집으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술을 잘하지는 못하는데 폭탄주 10잔 정도는 마셨어요. ‘오래 버티기’가 제 전문이었죠.”
삼성 시절, 술에 관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 한 가지. 문경은은 시즌 중 다음 경기를 3일 정도 남겨 놓고 지금은 은퇴한 노아무개, 명지대 코치로 가 있는 박아무개와 함께 자정 무렵 조촐한 술자리를 벌였다고 한다.
취침 시간에 방에 불을 켜놓고 있으면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에 불을 켤 수 있는 복도의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다 신문지를 깔아놓은 후 미리 사다 놓은 족발에다 소주를 들이켰는데 그 맛이 황홀함의 극치를 이뤘다고.
발동이 걸린 세 사람은 술이 떨어지자 결국 숙소 밖으로의 탈출을 계획했고 에스원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철조망을 넘어가야만 했다. 때마침 내린 눈으로 인해 담 넘어가며 엎어지고 넘어지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지만 술의 유혹을 떨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오전 훈련을 하려고 숙소를 나서는데 다른 곳은 아무 흔적도 없이 눈이 쌓였는데 그 철조망 부근만 숱한 발자국에다 미끄러진 자국 등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감독님 보시면 영락없이 걸려들 것 같아 후배들 시켜 흔적 지우느라 한바탕 소동을 피웠죠. 아마 감독님이 아셨는데 모른 체 하셨는지도 몰라요.”
연세대 시절은 문경은의 황금기였다. 체력도 가장 좋았고 인기 또한 연대 멤버 중 ‘넘버원’을 차지할 만큼 연일 상한가를 달렸다. 연세대가 위치한 서대문우체국에는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의 이름이 쓰여진 우편물 포대자루가 따로 비치돼 있을 정도였고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때는 초콜릿과 각종 선물들이 담긴 쌀자루가 숙소로 배달돼 왔었다.
“선수들 사이에 은근히 인기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훈련 마치고 숙소에 오면 매니저가 팬레터를 나눠주는데 모두 받자마자 앉아서 세어보잖아요. 누구 게 더 많이 왔나 해서. 그 모습이 참 재미있었어요.
▲ 문경은의 생후 12개월 때 사진. 꼭 여자 아이 같다. | ||
그날도 상민이가 애 때문에 가봐야 한다면서 먼저 일어서자 조금 있다가 지원이가 눈치보면서 만삭의 와이프가 데리러 왔다며 뒤따라가는 거예요. 순간 장훈이가 절 째려보며 ‘형도 갈 거유?’ 하길래 ‘야, 임마, 난 안 가. 밤새 너랑 있을게’ 했던 기억이 나요.”
이들 4명이 모이면 몸값만 20억원이라고 한다. 어렵게 살았던 시절에 비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신분상승이다. 억대의 선수들이 모이면 밥값은 누가 내느냐고 묻자, “연봉 제일 약한 제가 내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참고로 문경은의 연봉은 2억6천만원이다.
부잣집 막내아들 같은 부티 나는 이미지로 인해 여유있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을 것 같다고 말하자 문경은은 “부모님이 세탁소 하시며 어렵게 뒷바라지해주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종가집 장손이었어요. 형편은 어려웠지만 정말 밤잠 안 주무시고 다림질해서 번 돈으로 절 가르치셨어요. 당시엔 부잣집 애들만 신는다는 메이커 운동화를 3만원에 사주셨는데 학교 갔다오면 깨끗이 닦아서 머리맡에 놓고 잔 적도 있었어요. 장손이었기 때문에 우대를 해주셨던 거죠. 저 때문에 두 동생들은 완전 찬밥 신세였어요. 여동생이 제가 입던 옷을 물려 입고 자랐으니까요. 그게 지금도 미안해요.”
문경은은 ‘그래서 더욱’ 농구가 고맙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데 일조한 것도 농구고 농구로 인해 유명세도 탔고 남들 못 나가는 해외에도 돌아다녀보는 등 어쨌든 농구가 오늘의 문경은을 만들어준 ‘절대 가치’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유니폼 입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허재형이랑 (강)동희형이 은퇴를 미루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거든요. 만약 제가 부상으로 은퇴를 했는데 상민이나 (조)성원이가 코트에서 펄펄 날고 있다고 해봐요. 얼마나 열받겠어요. 선수생활 연장과 팀 우승이 요즘 제가 가장 관심을 두는 화두입니다.”
이젠 3점슛에 대한 욕심을 내기보다는 팀플레이를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문경은은 은퇴하기 전 챔피언반지를 끼어보는 게 가장 큰 소원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허재형이 부럽다니깐요.” 이런 꼬리표를 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