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트 실링 | ||
사실 징크스는 본인보다 언론이 만드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실제 미국서는 징크스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미국 스포츠 관계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징크스를 ‘미신’(superstition)으로 본다. 하지만 메이저리거들 역시 징크스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메이저리그 스타플레이어들의 기상천외한 징크스에 얽힌 사연들을 살펴봤다.
모든 종목의 선수들 혹은 감독에게는 독특한 징크스가 있다. 그런데 유독 야구선수들의 징크스가 두드러진다. 1백62경기의 장기레이스를 펼치기 때문이다.
눈썰미가 뛰어난 메이저리그 마니아라면 지난 겨울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된 정통파 커트 실링(38)이 마운드에서 덕아웃으로 갈 때 취하는 독특한 제스처를 눈치챘을 것이다. 실링은 절대로 파울라인을 밟지 않는다. 그 지점에 가면 깡충 뛰어서 선을 넘는다. 일종의 징크스인 셈이다. 선을 밟았을 때는 불운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선수들의 징크스를 미신 또는 일종의 ‘의식 행위’로 파악한다. 경기 전 헬멧과 배팅 글러브를 신주단지 모시듯 정성스럽게 다루는 행동은 의식의 집행(ritual)처럼 보인다.
▲ 모이세스 일루 | ||
선수들의 징크스 종류도 제각각이다. 오랫동안 휴스턴에서 활동한 투수 세인 레이널즈(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등판 전 항상 햄버거를 먹었다. 미국에는 햄버거 종류도 수십 가지인데 그 중에서도 유독 ‘버거킹’ 햄버거를 즐겼다.
1970년대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세 차례 수상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짐 파머는 등판 전에 팬케이크를 먹은 뒤 승리를 따내 팬케이크는 항상 승리를 불러온다고 믿었다. 1968년 시즌 최다 30승을 거뒀던 데니 맥클레인은 당시 이닝 때마다 펩시콜라를 다 마셔 콜라 징크스를 만들기도 했다.
시카고 컵스 외야수 모이세스 알루는 13년 동안 쓴 글러브를 여태껏 끼고 경기에 출장한다. 또 경기 당일에는 꼭 언더셔츠를 뒤집어서 입고 나간다. 그래야 수비도 잘되고 안타도 잘 친다고 믿는다. 지금은 은퇴한 진 모크 감독은 이기는 날에는 절대로 언더셔츠와 유니폼을 빨지 않기로 유명했다. 10연승 정도 하면 옷에서 나는 쾌쾌한 땀냄새로 숨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3천 안타의 주인공 웨이드 보그스(보스턴, 뉴욕, 탬파베이)는 현역 시절 늘 같은 시각에 몸을 푸는 징크스가 널리 알려졌다. 저녁 7시30분 경기가 있으면 7시17분 정각에 구장에서 단거리 달리기로 몸을 풀었다. 그리고 경기 전에는 치킨을 먹으며 심리적 안정감을 찾았다. 보스턴 레드삭스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의 타격행위 때의 모습은 의식행사나 다름없다.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가면서 장갑 덮개를 붙였다 떼었다하고 발로는 땅바닥을 시종일관 때린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아마 투수도 헷갈려서 가르시아파라에게 안타를 자주 얻어맞는 모양이다.
▲ 로저 클레멘스 | ||
한때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몸담았던 돈 칼크스타인 코치는 “선수들의 반복된 동작은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해준다. 그리고 선수들은 그 행위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며 징크스를 설명했다.
선수들은 보통 배트, 글러브, 등번호에 큰 애착을 갖는다. 경기력 향상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고 종종 징크스 증후군으로 나타난다. 현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돈 서턴(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해설자)은 15년 동안 다저스에서 등번호 20번을 달고 있었다. 오클랜드로 이적하면서 20번을 달려고 했으나 당시 포수 브루스 보치(현 샌디에이고 감독)가 사용하고 있었다. 보치의 기량은 서턴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평범한 선수였다. 서턴은 보치에게 골프클럽을 사주고 20번을 사실상 빼앗았다.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휴스턴 애스트로스)도 96년 보스턴에서 토론토로 이적할 때 서턴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 클레멘스는 텍사스 대학 때부터 21번을 줄곧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미 토론토에서는 카를로스 델가도가 달고 있었다. 델가도는 클레멘스가 시가 1만달러의 롤렉스 금장 시계를 선물하자 21번을 넘겨주었다. 델가도가 현재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시카고 컵스에서 최희섭과 한솥밥을 먹었던 에릭 캐로스(오클랜드)도 등번호에 유난히 애착을 보였다. 다저스 시절의 23번을 사용하고 싶었으나 컵스의 전설적인 2루수 라인 샌드버그의 번호였다. 그래서 UCLA 때 사용한 26번을 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마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빌리 윌리엄스 몫이었다. 캐로스는 고심 끝에 23번을 거꾸로 한 32번을 달고 뛰었다.
국내에서는 가끔 장의차량을 보면 게임이 잘 풀렸다는 감독들이 있었다. 미국서는 이와 비슷하게 트럭에 맥주를 가득 실은 차를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를 보면서 이들 스타들의 징크스를 유심히 살펴보면 한층 더 야구가 흥미로울 것이다.
문상열 스포츠서울 USA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