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4월1일, 현대캐피탈의 전력 강화를 위해 지난달 중순 긴급 초청한 이탈리아 출신 ‘데이터 분석관’ 도메니코 라사로(애칭 ‘민모’)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타난 김 감독의 스타일은 한마디로 ‘유쾌·상쾌·통쾌’ 그 자체였다. 한국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민모씨를 상대로 짓궂은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띄우고, 립 서비스(?) 차원에서 김 감독한테 ‘잘생겼다’고 던진 기자의 말을 이탈리아어로 통역까지 해주며 기분 좋게 웃어 젖히는 모습은 마치 천진난만한 ‘소년’이나 다름없었다.
김 감독은 비록 팀은 챔피언 결정전에서 패배의 쓰라림을 맛봤지만 시즌 중 공언한 대로 삼성화재를 상대로 78연승을 저지하고 1승을 올렸다는 사실에 한층 고무된 모습이었다. 김 감독은 챔피언 결정전 2차전 상황을 재연하며 경상도 특유의 구수한 입담을 선보였다.
2003년 11월, 현대캐피탈의 사령탑을 맡아 이탈리아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김호철 감독이 신치용 감독이 주름잡던 한국 배구계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4개월 남짓이었다. 모래알같이 흩어진 선수들의 전력을 한데 모아 조직력을 키우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 감독은 선수들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거함’ 삼성화재를 무너뜨리는 진가를 발휘했다.
“한국 와서 보니까 삼성을 빼놓고는 모든 팀들이 1위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니라 2위 다툼만 하고 있더라고. 1위는 이미 삼성 몫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올려다볼 생각도 안하는 거야. 그러니 그게 경쟁이 되겠어. 난 애당초 삼성을 잡는 게 목표였어. 그래야 우승할 수 있으니까. 아무도 안한다면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불가능할 것 같던 일도 자꾸 파 보고 분석해 보고 머리 굴려 보니까 틈도 보이고 허점도 보이더라고. 기술 보완보다 더 시급했던 건 선수들의 자신감 회복이었지. 방법은 ‘뻥’치는 게 제일이었고.”
김 감독이 말한 ‘뻥’은 바로 삼성화재를 상대로 한 언론플레이였다. 즉 지방 투어 대회를 돌면서 조금씩 말의 수위를 높여갔던 것. 처음 서울대회에서 예선 탈락 후엔 ‘이제 시작이다’라며 불을 지폈고 목포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했을 때는 ‘삼성의 목을 서서히 조이겠다’는 말로 승부수를 띄우는가 하면 부산대회를 앞두고선 ‘시즌 전까지 삼성화재를 상대로 1승 이상을 거두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인데 솔직히 삼성을 이길 자신은 없었어. 꼭 한 번은 삼성을 두드려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는 거야. 그렇다고 감독이 내색할 순 없잖아. 무조건 큰소리칠 수밖에. 하지만 20% 정도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어. 6차 투어까지 삼성에서 신진식과 김세진을 거의 투입시키지 않았거든. 만약 이렇게만 계속 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계산한 거지. 그런데 세진이랑 진식이가 들어오니까 게임이 안 되더구먼.”
김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삼성화재를 상대로 첫 승을 따내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해냈다.
경기 후 신치용 감독과 악수 대신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고 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 감독은 밤마다 수 백 번도 더 넘게 연습하고 연습했던 ‘그 말’을 신 감독의 귀에다 쏟아냈다. ‘미안하다. 연승이 깨진 건 친구로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삼성이 졌다는 사실은 한국 배구가 발전한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아마 내 얘기 제대로 못 들었을 거야. 당시 신 감독이 좀 흥분했었거든.”
김 감독이 20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 배구계에 다시 발을 들여 놓으며 충격을 받은 건 소문으로만 듣던 한국 배구의 침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와 사연들이 배구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무엇보다도 삼성의 독주가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내가 현대를 맡기 전 귀국할 때마다 신 감독이랑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런 얘길 했었어. 이젠 그만 욕심을 버리라고. 너만 살지 말고 다 같이 살아보자고. 그래서 돌아선 배구팬들의 발걸음을 배구장으로 끌어들이자고. 그러나 신 감독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더라고.
솔직히 (신 감독을) 더 괴롭혀 주고 싶었어. 어느 인터뷰에서 신 감독이 100연승이 목표라고 말해 내가 그랬지 그렇게 되나 보자고. 그러니까 이번엔 시즌 10연패가 목표라고 하네. 두고봐. 절대 그렇게 되진 않을 테니까.”
김 감독은 내년 시즌부턴 삼성을 잡는 게 목표가 아니라고 한다. ‘삼성 타도’가 아닌 삼성과 대등한 수준에서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현대의 전력을 끌어올려놓겠다는 자신감도 피력했다.
털털한 모양새며 입담의 수준으로 가늠하면 소주 두서너 병은 너끈할 것 같은데 의외로 김 감독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인터뷰 전에는 ‘주당의 자웅을 겨뤄보자’며 잔뜩 겁을 줬던 터라 나름대로 단단히 각오하고 나갔건만 김 감독은 맥주 한 잔에 뻘겋다 못해 흑빛으로 얼굴색을 달리 한 채 ‘허허실실’ 작전을 구사했다.
그는 현대 감독을 맡으며 졸지에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됐다. 이탈리아에 가족들을 두고 혼자 귀국했기 때문에 독수공방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배구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싸나이의 열정’을 현대팀에 ‘올인’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가 편할 때도 많아. 거기선 ‘쓰레빠’에 반바지를 입고 다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거든. 처음 선수로 이탈리아 리그를 노크했을 때는 깜깜했어. 말이 통해야지 뭘 해먹지. 벙어리나 마찬가지로 생활하다보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 그러다보니 선수들의 플레이가 맘에 들지 않으면 욕을 하고 발로 차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어.
걔네들 눈엔 내가 희한한 놈이었을 거야. 외국에서 온 놈이 오히려 자신들을 가르치려 드니까. 자주 싸웠지. 그러면 걔네들 꼭 하는 말이 있더라고. ‘너희 나라가 못 살아서 돈 벌러 여기까지 왔으면 돈이나 벌고 가라’는 게 주 내용이야. 그러면 다음부턴 그렇게 말한 선수한테는 공을 안 줬어. 내가 세터잖아.”
81년 이탈리아 파르마 배구팀 선수로 이적한 김 감독은 84년 올림픽대표팀 선수로 뽑혀 한국에 들어왔다가 현대자동차서비스팀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다 결국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이탈리아 배구리그의 MVP 수상은 물론, 현지 기자들이 뽑은 ‘최고의 용병상’ 등을 수상했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팀을 우승시키는 등 이탈리아에선 대표팀 감독에 오르내릴 만큼 실력을 인정받으며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나이를 먹으니까 아무리 외국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고향만큼 좋은 곳이 없더라고. 한국이 그리웠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어. 그러던 차에 친정팀에서 ‘러브콜’이 왔고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은 거지.”
앞으로도 변수가 없는 한 계속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현대를 우승시키기 전엔 절대로 한국을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목표를 다잡는 것도 이탈리아로의 ‘또 다른 U턴’을 염려하는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다독거림만은 아닌 셈이다.
‘막걸리’ 타입의 ‘현대호’를 ‘의리로 살고 의리로 죽는 팀’이라고 정의한 김 감독은 배구 담당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 좀 드시겠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나? 나 못 마시지. 여기 술 상무 있잖아.” 김 감독의 옆에는 어느새 현대캐피탈 안남수 사무국장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