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지난해 5~6월 이명박 정부 고위 인사들 계좌를 무더기로 조회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친이계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사건 관련 이명박 전 대통령(왼쪽)의 ‘집사’로 불린 김백준 전 총무기획관 파일도 다시 들춰본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 DB
지난 1월 22일 이명박 전 대통령 특강 장소엔 수많은 취재진이 모여들었다. 퇴임 후 첫 공개 강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검찰이 지난 정권 고위 인사들 계좌를 무더기로 조회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이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표명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선이 쏠렸던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퇴임 후 대통령 기념재단을 만들려고도 생각했는데 내 주위를 뒤지고 다녀 포기했다”며 “정치도 생활도 깨끗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우회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또 강연 말미엔 일부 측근들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 뒤져 봐도 깨끗하니까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이 전 대통령 특강 다음날인 23일 몇몇 친이계 전·현직 의원들은 여의도에서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출정식을 겸하는 자리였지만 대부분 대화 내용은 검찰의 무더기 계좌 조회에 대한 성토였다고 한다. 당시 참석했던 한 친이계 의원의 말이다.
“지난해 송년회에서 처음 얘기가 나왔다. 한 전직 장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계좌 조회 통보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화를 듣던 이 전 대통령조차 그런 일은 드물다며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배경을 두고 여러 추측이 제기됐고, 여러 경로로 체크해 봤지만 실패했다. 이번에 검찰 해명을 듣고 김백준 전 기획관 등 지난 정권 실세들이 타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검찰은 관련 내용이 보도되자 “계좌조회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그 사실을 인정했다. 지난해 자원개발 의혹 수사 과정에서 피고발인이었던 김 전 기획관 아들 계좌를 추적하다 벌어진 일이라는 설명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김 전 기획관과 MB 정부 고위직 인사들 간 돈 거래 정황이 포착돼 확인에 나섰지만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추가 수사는 진행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앞서의 친이계 의원은 “검찰 해명에 기가 찼다. 자원개발 수사를 하는데 왜 무관한 인사들의 계좌들을 모두 추적하느냐. 또 MB 기념재단을 만들기 위해 십시일반 김 전 비서관에게 출연금을 보냈다는 것은 조금만 알아보면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검찰이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꾼 것 역시 정권 차원의 ‘코치’를 받았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현 정권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해왔던 친이계가 그 어느 때보다 남다르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김 전 기획관이 수사망에 올랐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 전 기획관은 지난 정권 시절 청와대 살림을 책임지는 요직, 총무기획관을 맡았기도 하지만 30년 넘게 ‘MB 집사’로 불렸을 만큼 이 전 대통령 최측근으로 꼽힌다. 이 전 대통령의 재산 형성 등 은밀한 부분에까지 깊숙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의 BBK 차명의혹, 도곡동 땅 실소유 논란, 내곡동 사저 매입 등에 빠짐없이 거론됐고, 여러 차례 검찰 조사도 받았다. 친이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우리가 보기에 김 전 기획관은 집사가 아니라 MB 수호신이다. 오랜 세월 곁을 지키면서 궂은일을 했다. MB가 가족만큼 신뢰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검찰은 김 전 비서관을 표적 수사한 게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친이계는 물론 정치권 인사 대부분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검찰이 김 전 기획관을 포함해 무더기 계좌를 조회한 시점은 현 정부가 대대적인 사정 정국을 조성한 직후다. 그것도 지난 정권을 겨냥했을 것으로 보이는 수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착수되고 있을 때다.
당시 검찰은 자원외교, 포스코, KT&G 등 MB 정부 고위 인사들이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는 사건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검찰이 MB 정부 실세들 계좌를 조회한 게 단지 자원개발 의혹 수사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배경이다. 서울중앙지검 고위 관계자 역시 “솔직히 말하면 고위 공무원 또는 정치인들에 대한 이런 식의 무더기 계좌 조회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다.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더군다나 비슷한 무렵 사정당국은 김 전 기획관이 2012년 특검 조사까지 받았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사건 파일도 다시 들춰봤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자원개발 수사 과정에서 포착된 돈 거래 내역을 밝히기 위해 계좌를 추적했다는 검찰 설명과는 다소 배치된 것으로, 현 정부가 김 전 기획관과 MB 일가 주변을 겨눴던 방증으로 풀이된다.
이시형 씨, 이상은 씨.
“(이번에 내곡동 땅을) 다시 살펴본 것은 맞다. 특검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진술을 꼼꼼히 살펴봤더니 문제점들이 있었다. 특검이라고는 하지만 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잘 할 수 있었겠느냐. 이제는 ‘자연인 이명박’이다. 결단만 내리면 얼마든지 재조사가 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이뿐 아니라 지난해 5~6월 MB 일가와 관련된, 김윤옥 여사 친인척 비리·이 전 대통령 차명 의혹이 끊이지 않는 다스 등에 대해 보고서가 작성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사정당국은 시형 씨에게 6억을 빌려준 이상은 씨가 어디서 그 돈을 확보했는지에 대해 은밀히 확인 작업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실상 MB 일가의 ‘돈줄’을 파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MB 측이 무더기 계좌 조회가 대대적인 지난 정권 사정 드라이브의 일환이라고 우려하는 것과 맞닿아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치권 일각에선 친이계의 이러한 스탠스를 두고 4월 총선 전략과 연관 짓고 있다. 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전략으로 세 확산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의 원로 인사는 “친이계가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에 대해 불쾌하다. 검찰이 다 설명하지 않았느냐.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친이계의 또 다른 의원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계좌 조회 사실을 일부러 언론에 흘렸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친이 진영에선 정권 핵심부가 지난해 계좌 추적 등을 통해 확보한 자신들의 약점을 공천에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감지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