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많은 인물로 우승 후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김태일 감독(43)과 술을 마시며 자꾸 지난해 이맘때쯤 ‘취중토크’를 했던 SK 나이츠의 이상윤 감독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 사람이 성균관대 동기생이라고 한다. 이 감독이 영업사원에서 프로농구팀 감독에 올랐다면 김 감독은 농구팀 통역을 하다 실직 상태에서 만년 꼴찌팀의 부름을 받고 금호생명의 감독을 맡게 된 케이스. 김 감독의 드라마틱한 인생살이를 들여다봤다.
무명의 선수 시절, 91년 자비로 떠난 4년간의 미국 코치 연수, 귀국 후 고등학교 코치를 전전하다 나산(현 KTF)의 통역 겸 코치를 맡음, 2001년 가까스로 감독대행까지 올라갔으나 그해 5월 성적부진으로 ‘잘린’ 후 다시 야인 생활, 그리고 2년 5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금호생명 감독으로 부임 후 6개월 만에 여자 농구의 정상 탈환.
김태일 감독의 짧은 이력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면 ‘노총각’으로 알려진 사생활도 여기자의 입장에선 여간 흥미로운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우승 ‘뒷담화’를 듣다가 자리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에 슬쩍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예상 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노총각’한테 재미를 곁들인 약간은 짓궂은 질문을 준비하고 있던 기자 입장에선 개인적인 아픔을 안고 있는 남자의 망설임 끝의 고백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한 언론에서 자신의 프로필을 잘못 소개하는 바람에 지금껏 줄곧 ‘노총각’으로 알려졌다는 부분에선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김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했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지금은 아픔의 잔재마저 흐려져 여유 있게 ‘과거’를 돌이킬 수도 있다며 미안해하는 상대방을 배려했다.
그는 감독 자리에 오르기 전 2년여의 야인 생활을 하며 가장 가슴 저린 일화로 여동생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갔던 일을 꼽았다. .
“2001년 나산이 골드뱅크로 매각된 후 황유하 감독이 경질되자 제가 감독대행을 맡았어요. 여동생 병원 치료비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라 감독이 아니더라도 코치 생활을 계속하길 바랐죠. 그런데 4개월 만에 물러났어요. 성적 부진의 책임으로. 그동안 숱한 역경을 헤쳐 왔다고 자부했는데도 그때만큼 절망적인 순간도 없었어요.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그런 기분이었죠. 결국 여동생은 저의 좋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어요.”
김 감독이 금호생명 감독으로 선임됐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농구인들은 저마다 ‘의외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대학 때 무명으로 지내다 실업팀 경험조차 없이 미국에서 연수를 받고 온 경력 외엔 이렇다 할 프로필이 없었기 때문이다.
“금호생명에 이력서를 제출한 뒤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했어요. 사실 연·고대 출신들이 장악하다시피 한 농구판에서 성균관대 출신의 제가 한자리를 꿰차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런데 금호생명에선 지명도보다 비전을 가지고 뭔가 새로운 걸 추구하는 참신한 인물을 찾았고 때마침 제가 그 가이드라인에 걸린 거죠. 궁합이 잘 맞았던 거 같아요. 구단과 선수들이랑.”
지난해 FA로 자유 신분이 된 김지윤과 이언주를 스카우트해온 건 최대의 ‘걸작’이었다. 또한 용병을 뽑는 안목까지 탁월한 데다 김 감독의 선진 농구 방식과 자유스러운 훈련 스타일이 절묘하게 버무려져 금호생명 선수들은 만년 꼴찌의 한을 털어내고, 김 감독은 초보 감독의 ‘감격 시대’를 연출하며 인생의 짜릿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김 감독이 선수들로부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부분은 바로 자율적인 훈련 방식이다. 선수 시절 구타와 강압에 이골이 났던 김 감독은 선수들을 최대한 풀어줬다. 대신 프로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하면서.
“여자팀을 맡으며 새삼 놀란 게 있다면 남자선수들보다 여자선수들의 규율이 더욱 엄격하다는 사실이에요. 신인이 외출을 하려면 바로 위 선배부터 최고참 선수들한테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외출을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그런 형식적인 규율을 아예 없애 버렸어요. 능률적인 팀 운영을 위해선 필요한 조치라고 확신했거든요. 팀이 연패에 빠졌을 때 제가 선수들한테 하소연한 적이 있었어요. 자율적인 팀 운영의 존폐 여부는 바로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고.”
김 감독은 무명 선수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자비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불투명한 생활이었고 주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유학 생활 자체도 버겁기만 했지만 오기와 인내로 4년간을 버텨냈다. 그래도 UCLA, 플러튼주립대학 등 미국 대학 농구의 명문으로 꼽히는 두 대학을 오가며 코치 연수를 받는 동안은 이전에 맛보지 못한 행복함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배운 건 많은데 써먹을 데가 없었으니까.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우선 고등학교 코치 생활에 만족하며 기회를 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취중토크’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제가 너무 모범답안만 내놓는 것 같아서….”
사실 그랬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생생한 김 감독의 멘트들은 ‘바른생활 선생님’을 보는 듯한 착각까지 일게 했으니까. 외모상으로 셈해 본 ‘견적’과 주위 소문들을 종합해 보면 2차 아닌 3차까지도 갈 것 같은 분위기인데 김 감독은 교과서적인 답변들만 늘어놓아 기발한 애드리브를 기대하는 기자의 희망사항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당분간은 독신 생활을 고수하겠다는 남자, 남자팀의 ‘러브콜’이 와도 4~5년간은 여자팀에서 더 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감독, 미처 확인을 못해 아쉽긴 해도 ‘필름’이 끊겨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당’, 인간 김태일은 욕심이 참 많았다. 첫 술에 우승을 해서 배부를 수도 있을 거라는 판단은 순진한 착각이라고까지 말했다.
두고 봐야겠다. 그가 두 술에 배부를지, 아니면 세 술이 될지. 그때는 말술을 먹여 그의 ‘필름’을 완전 끊어 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