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6일 고건 총리가 아테네 올림픽 D-99일을 맞아 태릉선수촌을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
‘터줏대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선수촌의 변화는 무엇보다 생활환경이다. ‘헝그리 정신’이 미덕인 시대였기 때문일까? 스포츠 스타들의 산실이라는 태릉선수촌이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선수들이 그리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지는 못했다. “과거에는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설렘과 기쁨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생활했나 싶네요.” 지난 88년부터 16년간이나 국가대표 생활을 했던 김택수 탁구대표팀 코치(34)의 말처럼 선수촌의 시설이 열악했던 것이 사실.
작은 욕조가 덜렁 하나 있었던 지하의 목욕탕.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화장실에 먼저 가려고 일찍 일어나는 선수도 있었는걸요.” 1990년부터 15년간 태릉선수촌을 지켜왔던 심권호 레슬링 국가대표 트레이너(32·주택공사)는 화장실에 얽힌 해프닝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화장실 칸이 6개밖에 없다보니 아침에 큰일(?)을 치르는 것이 곤욕이었다고. 30명이 넘는 선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 적도 있다고 하니 튼튼한 장을 가진 선수들에게 ‘황금빛’을 보기란 그야말로 ‘큰 일’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2인1실에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려 있고 냉장고와 옷장, 개인책상까지 갖춰져 있으니 그야말로 시골 읍내의 여인숙에서 호텔 수준의 숙소로 환골탈태한 모습이다.
보금자리(住) 수준이 변했으니 식(食)수준이 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식부터 양식까지 제공되는 다양한 식단, 무제한으로 공급되는 음료수와 과일, 넘쳐나는 간식거리. 신식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한 널찍한 식당에서의 세끼 식사는 엄청난 훈련량으로 충분한 영양보충이 필수인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생활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선수들이 먹는 장소나 먹거리 모두 충분치 못했다. 지금의 태권도 훈련장에 위치했던 식당은 3백명이 넘는 선수들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기에 너무 좁았고, 음식 또한 지금과 같이 충분한 양이 아니었다. 특히 선수들의 불만 사항은 한 사람당 한 캔씩만 지급되었던 음료수. 하루 종일 땀을 흘리는 선수들이기에 캔 하나 가지고 갈증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것. “음료수 좀 더 주세요”라는 말에 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물 먹어”였다고.
▲ 김택수-김조순 커플 | ||
소원이 이뤄진 것일까. 몇 해 전 선수들을 위한 PC방과 노래방 등 오락 시설이 선수촌에 들어섰다. 하지만 정작 오락시설을 바라던 선수들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갈이된 선수들의 신세대 취향에 맞는 최신 오락시설을 설치했기 때문에 오락 시설은 신세대 선수들의 차지가 되었고 ‘터줏대감’들에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고.
14년째 국가대표 생활을 하고 있는 펜싱의 이상엽(32·부산시청)은 “오래 있다 보니 세대차를 느낀다니까요. 예전엔 주말에 간단히 술 한잔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후배들을 보자면 제가 구세대란 생각이 드네요”라며 달라진 선수촌 문화를 설명했다.
이처럼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태릉선수촌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선수촌 커플들의 ‘몰래 데이트’.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는 선수촌 생활이라 훈련에 방해가 되는 연애는 예나 지금이나 금기사항. 따라서 끓는 피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은 선수들은 감독과 코치들의 눈을 피해 몰래 데이트를 할 수밖에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과거에는 따로 연락수단이 없어서 연인끼리 만나는 것이 비밀 작전을 방불케 했지만 지금은 휴대폰을 이용해 만남의 장소를 정할 수 있다는 사실.
몰래 데이트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남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선수촌 커플들은 어둡고 구석진 곳을 선호한다고 한다. 15년 동안 태릉에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선수촌 내부를 꿰뚫고 있는 심권호 트레이너는 최고의 데이트 장소로 크로스컨트리장을 소개했다. 그 이유는 역시 ‘가장 어둡고 후미진 곳’이기 때문이란다.
태릉선수촌 커플 출신인 김택수-김조순(전 양궁 국가대표) 부부의 경우는 주로 주차장을 애용했다고 한다. 행여 누가 볼까봐 손도 제대로 잡고 다니지 못했지만 어두운 주차장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의 긴장과 스릴 넘치는 데이트는 잊을 수 없다고. 김 코치는 선수촌 커플에겐 보안(?)이 생명 이라며 커플 선배로서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도 잊지 않았다. “차 안에선 절대로 동시에 내려서는 안 된다!”
최혁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