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진 | ||
지난 4월11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통쾌한 7회 KO승으로 WBC 페더급 챔프에 등극하며 20년 복싱인생의 결실을 보게 된 지인진(30·대원체육관)은 요즘 7월에 있을 1차 방어전을 앞두고 맹훈련중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91년 프로 데뷔 후 13년 만에 꿈을 이룬 감격을 안고 어느 때보다도 여유롭게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말 못할 속사정이 숨어 있었던 것.
지난 12일 대원체육관이 있는 서울 봉천동 부근의 한 고기집에서 소주잔을 기울며 챔피언 전후의 희로애락을 털어놓은 지인진은 2004년 세계 복싱 챔피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제가 챔피언 대전료로 얼마 받았는지 아세요?”
지인진은 처음에 술을 사양하다 기자와 잔을 부딪치며 뜬금없이 대전료 문제를 꺼내 들었다. 어렵게 말을 이어가는 표정엔 오랫동안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총 개런티가 16만달러(약 1억9천만원)였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받은 돈은 5천만원밖에 안 됩니다. 물론 한국챔피언이나 동양챔피언 때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큰돈을 벌어들인 거죠. 그러나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명목으로 지출되는 돈들이 워낙 많아 제가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25%밖에 안 되는 거예요.”
지인진의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권투선수의 매니저는 개런티에서 33%를 지급받는다. 거기에다 트레이너의 몫으로 떼는 10%도 매니저한테 돌아간다. 복싱에선 대개의 경우 매니저가 체육관 관장인 동시에 트레이너를 겸하고 있기 때문. 이러한 공식적인 수수료 외에도 홍보 활동, 원정경기일 경우엔 항공료, 숙박비 등을 제하다보면 선수의 몫은 25%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 어떤 매니저는 스폰서가 선수에게 10만~20만원씩 용돈을 주는 것도 자신의 몫으로 뗀다고 한다.
“전 그래도 많이 받은 편이에요. 동양챔피언이 돼도 2백만원 벌기 힘들어요. 1년에 한두 차례 열리는 대회에서 그 돈밖에 못 받는다면 아예 생활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대부분 직업을 갖고 있어요. 저요? 배운 게 없는 데 뭘 할 수 있었겠어요? 몸으로 때우는 ‘노가다’ 외엔.”
불과 2년여 전만 해도 지인진은 훈련이 없는 날엔 주로 공사장 잡부로 일하며 빈 주머니를 조금씩 채워 왔다고 한다. 이번에 받은 대전료로 그간 은행에서 대출받은 4천2백만원을 갚고 나니 생활비 쓰기에도 빠듯하다고 하소연했다.
“챔피언이 된 것도 기쁘지만 챔피언이 안 되었다면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돈을 한꺼번에 해결하게 돼 기뻐요. 앞으로가 문제죠. 방어전을 잘 치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음성적으로 이뤄진 대전료 문제의 투명성과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제 ‘목소리’를 내고 싶어요. 물론 이럴 경우 제 프로모터와 관장님께서 불편해 하실 줄로 알지만 더 이상 선수들이 말도 못하고 끌려다녀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복싱 글러브를 낀 지인진은 오랜 기간 무명이었다. 전 WBA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유명우가 은퇴하기 직전인 92년까지 스파링 파트너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단순히 맞는 ‘스파링 파트너’이기보다 유명우를 상대로 펀치를 휘두를 수 있는 ‘복서’이길 바랐다는 지인진은 처음에는 워낙 발이 빠르고 맷집이 좋은 유명우와 맞서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유명우가 은퇴하기 직전 자신의 펀치에 맞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했다는 것.
“당시 (유)명우형은 저한테 ‘신’이나 다름없었거든요. ‘신’이 조금씩 흔들려가는 건 ‘하수’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 아니죠. 그때의 인연으로 명우형과는 지금도 막역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챔프 출신 중 드물게 사회에서 성공한 케이스라 많이 닮고 싶어요.”
지인진은 지난해 10월 영국에서 마이클 브로디와 챔피언결정전을 치렀으나 판정승한 지 50분 만에 번복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영국에서 경기를 직접 관전한 김주성, 황선홍 등 축구인들이 나서서 판결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힘없는 지인진은 결국 브로디와 재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김)주성이형과 (황)선홍이형을 영국에서 만날 수 있었어요. 두 분은 무척 흥분하시더라고요. ‘판정을 번복하는 게 어디 있냐’면서. 승복하지 말고 즉각 이의를 제기하라며 방법까지 알려주셨지만 그건 인기 있는 스타선수한테나 해당되는 일이지 우리같이 힘없는 권투선수는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왜냐고요? 저의 권리를 대변해줄 프로모터마저도 세계복싱평의회(WBC)를 상대로 뭐라 할 수가 없거든요.”
WBC에선 판정 번복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하기 위해 당시 링 위에서 채워준 챔피언 벨트를 회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대결 후 ‘진짜’ 챔피언이 됐을 땐 ‘지난번에 그냥 준 걸로 벨트를 대신하자’며 아예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세계챔피언의 꿈을 갖고 지독히도 험난하게 살아온 20년 세월이 보상되는 순간이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복싱 챔피언의 서러움을 동시에 맛본 순간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최근 연속 안타 신기록으로 주목을 받았던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박종호가 지인진의 초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였다. 뉴스를 통해 박종호의 성공 스토리를 접하며 흐뭇한 마음에 몇 차례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왠지 부담스럽고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만약 지인진이 국민 스포츠로 각광받는 인기 종목의 선수였다면 별다른 주저함 없이 연락을 했을지도 모른다.
“세계챔피언이 돼도 사람들이 잘 알아보질 못해요. 한국에서 한 명밖에 없는 세계챔프인데도 말이죠. 그래서 편하기도 하지만 조금은 씁쓸하기도 해요.”
WBA, WBC 통합챔피언을 꿈꾸는 지인진은 ‘가늘고 긴’ 롱런에 연연하기 보단 화끈하고 파이팅 넘치는 경기로 잃어버린 복싱 팬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는 게 소원인 ‘생각 많은’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