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장소는 일본 도쿄 시내의 도쿄돔. 한국 스포츠팬들에게는 한일 프로야구 친선게임(일명 ‘슈퍼게임’)이 자주 열려 익숙한 돔 야구장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홈으로 사용하고 있는 도쿄돔 그라운드 안에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된 사각 링과 무대를 설치했다. 이날 입장 관중 수는 6만5천여 명.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일본 팬들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스포츠 팬들과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가장 싼 좌석인 B석 입장료가 5천엔(5만원), 가장 비싼 SRS석이 3만5천엔(35만원). 통상 2만~3만원 정도인 한국 격투기 대회에 비해 얼마나 K-1대회가 ‘장사’가 잘 돼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점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젊은 여성 관객이 많았다는 점. 이는 일본 스포츠 마케팅업계가 K-1이나 프라이드FC 등 남성 위주의 거친 격투기 대회를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화 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풀이된다.
▲ 영화 <여친소> 소개차 일본을 방문중이던 전지현은 영어로 대회개막을 선언했다. | ||
그러나 너무 떨렸던 탓일까? 전지현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짤막하게 대회 선언을 공표하던 중 “ K-1 world grand prix two thousand one” 이라고 영어를 구사했다. 2004년 대회가 갑자기 2001년 대회로 둔갑한 것. 순간 관중석 곳곳에서 ‘난다요?(뭐냐?)’, ‘what?’이라는 웅성거림이 흘러나왔지만 전지현은 별다른 사과 멘트 없이 당당하게(?) 살짝 웃음소리를 내더니 나머지 멘트를 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취재 결과 이날 전지현이 이 짤막한 멘트를 하고 주최측으로부터 받은 돈이 무려 1억원이었다는 후문.
곧이어 본 대회가 시작됐다. K-1은 1년 동안 전세계를 돌며 지역대회를 연다. 올 7월에는 사상 최초로 서울에서도 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한국계 혼혈 파이터인 데니스 강이 1차전에서 무명의 태국 무에타이 선수에게 실신, KO로 무너진 것은 스포츠팬들에게는 유명한 스토리다. 이런 식으로 각 지역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와 주최측이 일종의 시드배정처럼 선발한 선수를 합쳐 모두 8명이 결선에 진출했다.
데니스 강을 실신시킨 뒤 끝끝내 서울대회 우승을 차지, 이날 최종 결선에까지 출전한 ‘옹박의 후예’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 야간 경비원 출신으로 무명에 머물렀다가 올 8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지역대회에서 우승한 마이티 모(뉴질랜드), 일본의 자존심 무사시, ‘부메랑 훅’ 레이 세포(뉴질랜드), 한때 마이크 타이슨과도 경기를 가졌던 전 IBF세계 헤비급 챔피언 프랑소와 보타(남아공), 세계에서 가장 하이 킥을 잘 찬다는 피터 아츠, 은행원과 모델 출신으로 지난해 왕좌에 오른 ‘인텔리 파이터’ 레미 본야스키, 이미 K-1을 네 차례나 거머쥔 ‘미스터 퍼펙트’ 어네스트 후스트(이상 네덜란드) 등이 출전 선수다. 이 중 우승후보는 레이 세포와 레미 본야스키, 어네스트 후스트. 8강전, 4강전, 결승전까지 하루에 3경기를 치러야 우승할 수 있는 강행군이다.
첫 경기 카오클라이-마이티 모는 이날 경기 중 가장 박진감 넘치는 내용을 보여줬다. 79kg의 왜소한 카오클라이가 이변을 일으키며 결선에 진출한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보다 몸무게가 49kg이나 더 나가는 데다 강펀치까지 소유한 마이티 모에게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 그러나 카오클라이는 오른발 발차기를 마이티 모의 광대뼈에 적중, 1라운드 2분40초 만에 마이티를 실신시켜 버렸다. 이후 경기는 대부분 판정으로 끝났고 우승 후보들인 레이 세포와 어네스트 후스트, 피터 아츠가 탈락했다.
결승전은 밤 10시30분이 지난 늦은 시각에 레미 본야스키와 무사시의 대결로 치러졌다. 지난해와 똑같은 대진이었다. 연장전까지 승부가 갈리지 않아 재연장, 즉 5라운드를 마친 끝에 레미 본야스키의 3-0 판정승. 우승상금 40만달러(약 4억5천만원)와 함께 대회 2연패를 이룩했다. 경기가 끝난 뒤 절룩거리는 발을 이끌며 인터뷰실에 들어온 ‘패자’ 무사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난해에는 몰랐던 레미 본야스키의 약점을 알아낸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으나, 그 시각 ‘승자’인 본야스키는 무대 위에서 부인과 신나는 축하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도쿄=이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