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출범한 K-1에서는 그동안 숱한 이변이 이어져 왔다.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은 선수가 단 한 차례의 펀치에 나가떨어지는가 하면 ‘가능성 제로’라는 주변의 우려를 비웃으며 당당히 ‘난적’을 침몰시킨 선수도 많았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K-1에서도 유독 특정선수에게만 약한 일종의 ‘천적관계’는 존재한다. 심리적인 이유에서든, 테크니컬한 부분에서든 천적만 만나면 기를 못 펴는 선수들의 재미난 ‘먹이사슬’을 살펴보자.
K-1을 네 차례나 정복한 불멸의 파이터 어네스토 후스트(네덜란드·40). ‘112전 95승 16패’라는 격투기대회의 공식 전적이 말해주듯 완벽한 로킥과 컴비네이션 펀치로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링 위의 강자로 군림중이다. 레이 세포, 제롬 르 밴너, 무사시, 마크 헌트, 미르코 크로캅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그의 발 아래 모두 한 차례 이상 무릎을 꿇었다.
그런 후스트도 된통 당한 적이 있다. 바로 ‘괴물’ 밥 샙(미국·31)이 후스트의 천적.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두 차례나 망신을 당했다. 지난 2002년 10월 처음 맞붙을 당시만 해도 예상은 당연히 후스트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러나 공이 울리자마자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밥 샙은 경기초반부터 특유의 ‘멧돼지 스텝’을 밟으며 후스트에게 달려들었고 후스트는 놀란 입을 다물 틈도 없이 무자비한 펀치 세례 속에 TKO패를 당했다. 자존심이 상한 후스트에게 곧바로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12월 열린 월드그랑프리에서 리턴매치가 성사된 것.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2라운드로 시간이 길어졌을 뿐 후스트는 또다시 KO패라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후스트를 벌벌 떨게 만든 밥 샙이지만 정작 후스트에게 패했던 선수들에게는 ‘지독하게’ 두들겨 맞는 기현상을 나타냈다. 2003년 3월 미르코 크로캅과 맞선 밥 샙은 목 부위에 하이킥 한방을 맞고 1라운드 KO패 당했고 지난 2004년 연말 이벤트 대회로 열린 K-1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도 제롬 르 밴너와 4라운드 경기로 맞붙어 또 한 번 ‘원없이’ 두들겨 맞았다. 1, 3회를 입식타격룰로, 2, 4회를 종합격투룰로 치른 이날 경기에서 밥 샙은 1, 3라운드에서는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가 2, 4라운드에서는 밴너를 위에서 누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연출했다. 결국 승부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팬들 사이에선 “만일 K-1 룰로 모든 라운드를 진행했으면 살인(?)날 뻔했다”는 관전평이 잇따랐다.
지금은 프라이드FC 최고 스타로 군림하고 있지만 미르코 크로캅도 K-1에서 활동할 땐 늘 후스트의 벽에 가로막혀 분루를 삼켰었다. 96년과 99년 모두 3라운드 KO패로 눈물을 흘렸고, 2000년에는 판정패로 한계를 실감해야 했다. 지금도 ‘안티 크로캅’ 팬들이 크로캅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크로캅측은 하루 동안 8강전부터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치르는 K-1 월드그랑프리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프라이드로 옮겼다는 이유를 대고 있으나 안티 팬들은 “후스트가 있는 한 K-1 정복이 힘들 것 같아 도망쳤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경기가 93년 열린 초대 K-1 월드그랑프리 결승전. 당시 어네스토 후스트는 프랑코 시가틱(현재는 은퇴)이라는 크로아티아의 강타자에게 치욕스런 ‘실신 KO패’를 당한다. 시가틱은 바로 크로캅의 스승. 즉, 후스트는 스승(시가틱)에게 당한 패배의 아픔을 훗날 그의 수제자(크로캅)에게 고스란히 되돌려 준 셈이다.
지난해 12월 도쿄에서 열린 2004 K-1월드 그랑프리에서는 21세기 최고의 빅 매치가 이뤄졌다. 바로 90년대 최강자 후스트와 2003년도 챔프를 차지하며 ‘신황제’로 떠오른 레미 본야스키가 맞붙은 것. 결과는 치열한 난타전 끝에 본야스키의 판정승. 이후 본야스키는 결승까지 진출, 재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치르며 무사시를 누르고 2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당분간 독주가 예상될 정도로 본야스키의 기량이 출중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사실 3년 전만 해도 본야스키 역시 그라운드에서 무릎을 꿇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2002년 7월 크로캅과 붙어 2라운드 TKO로 패한 것. 그러나 당시 본야스키를 누른 크로캅은 경기 후 “앞으로 본야스키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애정어린 위로의 말을 전했고, 그 말은 이듬해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매치 결과들을 다시 정리 해보면 시카틱은 후스트를 꺾었고, 후스트는 시카틱의 제자 크로캅을 꺾었고, 크로캅은 본야스키를 꺾었으며 그 본야스키는 다시 후스트를 꺾었다. 물고 물리는 먹이 사슬이다.
한편 최근 들어 부상의 여파로 다소 주춤하지만 후스트와 함께 초기 K-1을 양분했던 스타가 피터 아츠(35·네덜란드)다. ‘하이킥의 원조’라는 별칭답게 화려한 발차기를 앞세워 K-1 왕좌를 세 차례나 정복한 또 다른 강자다. 역시 앤디 훅, 레이 세포, 알렉세이 이그나쇼프 등 그가 거둔 승리의 명단에는 거물급 희생자들이 대거 올라있다. 그런 그가 시릴 아비디(29·프랑스)만 만나면 이상하리만치 기를 못 폈다. 지난 2000년에도 세 차례 만나 1승 2패로 열세를 보였다. 아비디는 K-1에서 거의 ‘B급’으로 통하는 선수다.
제롬 르 밴너의 스파링 파트너 출신인 아비디는 무사시와 게리 굿리지, 앤드류 톰슨 등 최정상급 선수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선수들에게 번번이 고배를 마시면서도 유독 피터 아츠만 만나면 괴력을 발휘했다. 피터 아츠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90년대 중반이었다면 언제든 아비디를 누를 실력이 되겠지만 이제 아츠의 나이와 부상경력을 감안하면 쉽사리 복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