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11일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선동열 감독(왼쪽 끝)을 비롯한 프로야구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
최근 대구구장에서 만난 선동열 감독에게 ‘모든 감독들과 친분이 있겠지만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특별히 상대하기 껄끄러운 감독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선 감독은 “그런 게 뭐 있겠나. 어차피 야구계가 서로 선후배 관계로 엮여있는데 딱히 누가 어렵고, 누군 쉽고 할 게 없다”고 말했다. 이 얘기를 곁에서 듣고 있던 KBS 하일성 해설위원이 한마디 덧붙였다. “평소에 친했던 사람과 경기하기가 더 어렵지 않겠어? 그런 면에선 한화 김인식 감독을 만날 때가 가장 곤혹스러울 것 같애.”
그러고 보니 김인식 감독(58)과의 관계가 묘하긴 하다. 김 감독과 선 감독은 80년대 초중반 해태에서 스승과 제자로 한솥밥을 먹었다. 야구계에서 인정하는 끈끈한 사제관계다. “우리 동열이”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김인식 감독이나, 수시로 안부 전화를 드리며 스승의 건강을 체크하는 선동열 감독이나 모두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다.
그런데 지난 2003년 말 선 감독이 삼성 수석코치로 입단하는 과정서 세간에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당시 KBO 홍보위원이란 직함을 달고 있던 선 감독을 영입하는 데 있어 가장 적극적이었던 구단은 바로 두산이었다. 박용오 구단주를 비롯해 그룹내 소장파 인사들은 ‘젊은 구단’을 지향하며 선 감독 영입에 총력을 기울였다.
난감한 처지에 빠진 건 김인식 감독이었다. 절친한 야구 후배가 하필이면 자신의 감독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돼버렸으니 아이러니였다. 결국 김인식 감독은 선 감독을 위해 용퇴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정작 선 감독은 두산 감독이 아니라 삼성 수석코치로 파란색 유니폼을 입었다. 두산과 김인식 감독 모두에게 상처가 남은 셈이다. 이 일로 ‘영원한 사제’로 여겨지던 김 감독과 선 감독의 사이에 금이 가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둘은 여전히 끈끈한 정을 과시하고 있다. 선 감독은 요즘도 수시로 김인식 감독에게 안부전화를 한다. 지난 겨울 김 감독이 뇌경색 초기 증세로 입원하는 등 건강 문제가 생긴 뒤부터는 전화 거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선 감독은 최근 “이제 술도 담배도 못하시는데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김 감독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김 감독이 “아주 죽을 맛이야. 너도 술 좀 줄여”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 감독과 김 감독은 올 정규시즌서 18차례나 맞부딪친다. 따라서 두 감독은 절친한 옛 관계를 떠나 투수 운용과 대타 작전 등 세세한 면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예의’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실전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게 결국 하일성 위원이 예고한 ‘껄끄러움’일 수도 있다.
기아 유남호 감독(54) 역시 해태에서 수석코치를 지내며 ‘투수 선동열’과 깊은 관계를 쌓은 인물. 유남호 감독에게 기자가 물었다. “제자였던 선동열 감독과 사령탑 대 사령탑으로 맞붙는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었나?” 그러자 유 감독은 “난 꿈에도 그럴 일이 생길 거라 상상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 이 답변 속에는 유남호 감독 자신이 사령탑이란 자리를 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겸손함이 담겨 있다. 또한 만약 자신이 감독을 맡더라도 선 감독과 같은 시기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가정의 뜻이기도 하다. 유 감독은 “(선 감독이 첫 해를 치르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워낙 유능한 친구니까…”라며 그 옛날 함께 우승을 밥 먹듯이 일궈냈던 후배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LG 이순철 감독(44)과 선동열 감독은 해태 입단 동기생이다. 예전엔 야구 잘 하는 선수를 1년 더 써먹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일부러 한해 늦추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 감독 역시 이 때문에 고교 진학이 1년 늦어졌고, 이른바 ‘빠른 63년생’인 선 감독과 동기생이 됐다. 이 감독이 선 감독에게 “야, 임마”라는 표현을 편하게 쓰는 데 반해, 선 감독은 “순철아”라는 호칭 빼고는 막말을 가급적 삼가는 건 이 때문이다. 둘의 관계야 이미 ‘최대 라이벌’이란 표현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정규시즌서 맞붙을 때마다 피가 튈 게 눈에 선하다.
두산 김경문 감독(47)에 대해 선 감독은 “고려대 선배였고, 학교 다닐 때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다”고 회상했다. 투수와 포수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관계가 또 있을까. 20여 년 전 고려대 앞 주점에서 1인분에 2백원짜리 삼겹살을 함께 구워먹던 선후배가 지금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려야하는 관계가 됐다. 야구판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롯데 양상문 감독(44) 역시 선 감독의 고려대 선배다. 고려대 재학시절 ‘한국야구의 보물’로 떠오른 선 감독을 바라보며, 역시 빼어난 왼손투수로 활약했던 양상문 감독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란히 감독이 된 지금, 둘의 맞대결도 흥미롭겠다. 특히 만년 최하위팀과 최강 전력팀의 사령탑으로 만나게 됐으니 말이다.
선 감독과 SK 조범현 감독(45)은 사뭇 다른 스타일. 조범현 감독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아니지만 쉼 없는 노력과 일기를 적듯 작성해온 선수 개인별 리포트를 통해 지도자로서 만개한 인물이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에 스타 감독이 된 선 감독과는 살아온 과정과 현재의 입지가 매우 다르다. 게다가 SK는 각 구단 전력분석원들로부터 ‘올 시즌 삼성을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 감독 역시 SK에 대해 “타력이 좋아졌고, 젊은 투수로 구성된 마운드가 힘이 넘친다. 정말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삼성-SK전이 그 어느 해보다 흥미진진해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 김재박 감독(51)은 지난해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때 당시 선동열 수석코치의 투수진 운용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김 감독 자신이 투수 운용의 대가로 칭송받고 있던 터에 선 감독이 이에 못지않은 능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가 우승했지만 김 감독은 선 감독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에 한 표를 던져줬다. 개인적으로는 심정수 외에 박진만마저 삼성에 빼앗긴 데 충격을 받고는 이를 갈고 있는 인물이 바로 김 감독이다. 명실 공히 한국 최고 감독으로 평가받는 김재박 감독은 올 시즌 선동열 감독이 이끄는 삼성만큼은 무조건 잡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