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5일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운영자가 익명으로 전해주는 페이스북의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을 통해 자신이 2016학번 학생이라고 밝힌 건국대 학생이 신입생 오티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25금(禁) 몸으로 말해요’라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신입생들에게 ‘구강성교’를 몸으로 표현하라고 지시하고, 같은 날 밤에 마련된 술자리에서는 남녀 신입생들끼리 과도한 신체접촉을 한 채 술을 마시도록 한 것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일요신문 DB
해당 학생은 “선배들이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 않으면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면서 “대학은 원래 이렇게 노는 건지, 내가 보수적인 건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해당 글은 순식간에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퍼졌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건국대 생명환경과학대학 오티 기획단은 “레크리에이션 중 하나로 ‘몸으로 말해요’를 진행했는데 자극적인 단어들로 인해 성적 수치심이 들 수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과도한 신체접촉이 문제가 된 술자리에 대해서는 “선후배 간 친목도모는 강요된 부분은 아니었으나 신입생 입장에서는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한 강요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양지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이 때문에 전형적인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사과하겠다”는 가해자식 사과 논리라는 지적과 비난이 일기도 했다.
다른 대학에서도 성추문 고발이 잇따랐다. 지난 2월 29일 연세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술 게임을 하는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선배들이 욕설을 퍼부었고, 새내기 남학생에게 동기 여학생의 신체부위를 만져보라는 등 이상한 것을 시켰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고려대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신입생이 “그놈의 러브샷, 선배 무릎에 제 자리 맡아놨어요? 왜 술을 그런 자세로 먹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처음 보는 동기한테 쇄골을 술잔으로 내주는 게 말이나 되냐”라며 울분을 토했다.
이처럼 사태가 심각해지자 교육부는 부랴부랴 “비정상적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적극 대응하겠다“며 대책을 내놓았다. 오티 행사를 가급적이면 1일로 줄이고 2일 이상 진행될 경우 책임자를 지정, 대학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지원하는 경비 중 숙박비는 자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방침은 ’행사‘에만 초점을 맞춘 단편적인 지침에 불과하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보지 않은 ’언 발에 오줌 누기‘나 다름없다는 게 대학가의 중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모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기획단 학생은 “오티 진행 전 모든 기획단이 불미스러운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교육을 받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며 “실제 오티에서는 대다수 학생들이 ‘나도 신입생 때 당했으니까 너희들도 당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행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일부 관련 학생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같은 일이 발생했음에도 선배들이 ‘관행’으로 포장했기 때문에 신입생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이의를 제기하면 ‘배신자’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애’로 찍혀서 학교 내에서 ‘아싸(아웃사이더, 대학 내 왕따)’취급을 받기 일쑤”라고 말했다.
교육부는 매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관련 매뉴얼을 대학 측에 보내고 있다. 건국대의 경우는 오티 기획단 대표들이 직접 총학생회 주관 하에 진행된 성교육을 포함한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이수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건국대 새내기의 용기 있는 ‘고발’로 수치스러운 대학 오티 문화가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일부 학생들은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을 보는 듯한 태도를 보여 학생들의 인식 변화로 인한 ‘정상적인 대학 문화’ 안착이 아직은 먼 이야기임을 보여줬다.
한 학생은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을 통해 “무슨 정의감에 글을 올린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들하시네요. 내가 정의를 실현했구나. 그런 자부심이라도 느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중략) 개강 전에 이렇게 큰 이슈가 생긴 덕분에 여기저기에 건대 홍보도 하고 참 좋습니다”라고 꼬집었다.
김태원 기자 ilyoss@ilyo.co.kr